[보이스V] "쪽지문으로도 밝혀내지 못한 진실"..'강릉 할머니 살인사건'

정윤식 기자 입력 2018. 11. 10.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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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뉴스의 새 스토리텔링 영상 컨텐츠 '보이스V'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사 고발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와 특별한 콜라보레이션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첫 순서는 많은 시간이 흐르고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지난 사건들을 되짚어보는 '그것이 알고싶다 X 보이스V - 미제 사건(Cold Case)' 시리즈입니다.

농번기 모내기가 한창이었던 강릉의 한 농촌 마을. 평화롭던 동네가 발칵 뒤집어진 건 평소와 다름없던 2005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자식들은 모두 객지에 나가고 혼자 살던 장 씨 할머니는 호탕하고 인심이 좋아 이웃이 찾아오면 저 문을 열고 반갑게 맞아주곤 했습니다. 그러던 할머니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곳은 자신의 집 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현장에서 발견됐던 쪽지문의 주인이 무려 12년 만에 밝혀졌습니다. 드디어 범인이 잡히는 듯했지만 법원의 최종 판결은 무죄였습니다. 사건은 왜 다시 미궁으로 빠져버렸을까요?

■ "테이프로 온몸이 감겨서.." 구타당한 뒤 끔찍하게 살해된 할머니

사건이 일어난 2005년 5월 13일, 할머니는 아침 일찍부터 침을 맞으러 다녀왔습니다. 할머니를 태운 버스가 집 앞 삼거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 40분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불편한 다리로 언덕길을 올라 집으로 향했고 그것이 숨지기 전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이웃 김 씨는 오후 4시쯤 할머니의 집을 찾아갔지만 평소와 달리 불러도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김 씨는 안을 들여다봤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할머니가 두 손과 두 발이 묶인 채 누워 있었고 얼굴에는 테이프가 감겨 있었던 겁니다.

[최초 목격자 김 씨 : "이 손이 이렇게 (뒷짐 지게) 된 상태인데 머리가 문쪽으로 누워 있는데 입에 뭘 이렇게 붙여놨어요."]

[손승규 / 당시 마을 이장 : "여기(얼굴)를 돌려 감았지. (테이프를 얼굴에 이렇게 돌려서요?) 돌려 감았지. 그래서 (가위로) 자르고 (테이프를) 헤치고 보니까 숨을 안 쉬니까 이걸 했지. (심폐소생술을요?) 네. 이거(심폐소생술) 하는데 이미 돌아가셨더라고."]

누가 할머니에게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부검 결과는 더 놀라웠습니다. 할머니의 양쪽 광대뼈 주변에 심한 멍이 들어 있었고 갈비뼈 골절과 장기 파열까지 온몸에서 심한 구타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목숨을 앗아간 직접적인 원인은 외상이 아닌 질식이었습니다. 심한 구타를 당한 상태였지만 테이프로 입과 코를 막지 않았더라면 살아 있었을 수도 있는 겁니다.

이상한 점은 또 있습니다. 이미 테이프로 할머니의 손과 발을 묶었던 범인. 그런데 할머니의 손은 전화선과 휴대전화 충전기선으로 두 번이나 더 결박된 상태였습니다.

[황준식 / 전 강원경찰청 미제사건 팀장 (2017년 11월) : 현장에 있던 전화선 있죠. 전화기 선을 끊어서 결박에 사용했죠. 이게 이제 손을 양 뒤로 결박할 때 사용됐던 휴대전화 충전기 선이고요."]

현장의 화장대와 싱크대, 방안의 서랍장까지 모두 열려 있었습니다. 어지럽혀진 현장 때문에 강도의 소행이라는 추측도 나왔지만 사라진 건 할머니가 차고 있던 금반지와 금팔찌뿐이었습니다.

3천만 원이 들어 있던 통장과 현금이 집안에서 발견되면서 경찰 수사는 강도를 위장한 면식범의 소행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당시 범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 현장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가족부터 마을 주민까지 용의자로 조사를 받았지만 혐의점은 없었습니다.

■ 12년 만에 검거된 용의자...쪽지문 주인 찾았지만 재판 결과는 '무죄'

그로부터 12년 동안 할머니의 죽음은 미제사건으로 묻혀 있었습니다. 사건이 다시 주목받게 된 건 지난해 9월이었습니다. 사건 현장에서는 1cm 남짓한 쪽지문만이 유일하게 발견됐습니다. 당시에는 쪽지문만으로 용의자를 특정하기 어려웠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된 겁니다.

할머니 시신 옆에 놓여 있던 테이프 안쪽 종이에 남아 있던 쪽지문의 주인은 40대 남자 정 씨로 밝혀졌습니다. 경찰은 당시 정 씨가 장갑을 낀 채 할머니 집에 침입했고 할머니를 폭행한 뒤 테이프로 결박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이때 테이프를 떼려고 장갑을 벗었다가 지문이 남았고 다시 장갑을 끼고 집안을 뒤지다가 금품을 발견하지 못하자 금붙이만 뺏어 도주했다는 겁니다.

[황준식 / 전 강원경찰청 미제사건 팀장 (2017년 11월) : 과거에 절도 전력이 좀 있었고요. 이 건과 유사한 살인은 아니지만 부녀자를 폭행한 다음에 제압을 해서 금품을 훔쳐 나와서 구속됐던 전력이 있었습니다."]

경찰이 정 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정 씨는 7년 형을 받고 복역한 강도 전과자였습니다. 체포 직후 이뤄진 거짓말탐지기 조사에서 정 씨의 대답이 모두 거짓으로 나오면서 사건은 그렇게 해결되는 듯했습니다.

경찰은 12년 만의 미제사건 해결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재판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정 씨에 대한 1심 판결은 무죄였습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에서 9명의 배심원 가운데 무려 8명이 정 씨가 살인범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1심 재판 과정을 지켜봤던 할머니의 아들 한성희 씨. 12년 만에 어머니를 살해한 진범이 잡혔다고 생각한 그는 무죄 판결을 들었을 때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한성희 / 피해자 아들 : "지금이라도 범인을 잡아서 다행이다. 이제는 진짜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겠구나 했는데 1차 공판 때 보고 내가 실망을 얼마나 했는지. 이러면 우리나라가 정의가 뭐가 필요 있고 해도 해도 이게 너무 한다 진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1심 법원의 판단을 뒤집기 위해 검찰은 항소했지만 지난 10월 항소심 재판부도 정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검찰이 상고를 포기하면서 사건은 다시 미제로 남게 됐습니다.

취재진은 유력한 용의자이자 쪽지문의 주인인 정 씨를 만났습니다. 정 씨는 경찰이 아무 근거 없이 자신을 범인으로 몰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정 씨 : "(처음 배정받은 국선) 변호사가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정○○ 씨 빨리 시인하면 5년 깎고 시인 안 하면 5년 더 받아'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그거(국민참여재판)를 한 거예요. 제가.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봐요. 아무 이유 없이 잡아 가지고 뭐 범인이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고 이런 식으로 조사를 하면 안 되죠."]

정 씨는 자신의 강도 전과와 이번 사건은 전혀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할머니가 살해된 강릉에는 가본 적도 없다는 정 씨. 그럼 테이프의 쪽지문은 어떻게 된 걸까.

정 씨는 낚시할 때 쓰던 테이프를 오토바이에 싣고 다니다 잃어버렸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심 재판에서 정 씨를 변호했던 국선 변호사는 거짓말 탐지기가 증거 능력이 인정되지 않는 비과학적 수사기법이라고 일축했습니다.

[정 씨 담당 1심 국선 변호사 : "이 사람을 거기서 봤다는 사람도 없고 이 사람이 그 범행을 저지를 만한 어떤 경위도 찾아볼 수 없고 유일하게 달랑 지문 하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머지는 입증이 하나도 안 돼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지문 하나 있으면 이거 무기징역 선고해서 30년 살릴 수 있겠느냐? 그게 판결의 결론이죠."]

■ 현장에서 발견된 특이한 매듭...할머니를 살해한 진짜 범인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13년 전 할머니를 살해한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 취재진은 프로파일러와 함께 2005년 강릉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시 분석해봤습니다.

동네는 동해안을 따라 뻗어 있는 고속도로와 강원도를 관통하는 국도 사이에 위치해 차로 이동하는 외지인도 쉽게 지나갈 수 있는 길목입니다. 마을 언덕 가장 위쪽에 있었던 할머니의 집은 비면식범의 범죄대상이 되기 쉬운 조건이라는 게 전문가의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할머니를 여러 번 결박하고 잔인하게 구타한 이유는 무엇일까.

[권일용 / 프로파일러 : 피해자는 상당히 고령이시잖아요. 그리고 저항하기 어려운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폭력이 행사됐다는 것은 목적을 가진 행동으로 볼 수가 있는데 이 목적이 결국 뭐냐 하면 귀금속이나 또는 현금이나 이런 물건들을 어디에 숨겨 놓았느냐를 추궁할 때 가장 많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닌 비면식범의 범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다른 범죄심리학자들의 의견도 비슷했습니다. '비면식범 그중에서도 금품을 목적으로 한 강도일 가능성이 크다'

[이수정 / 경기대 범죄심리학 교수 : "폭행을 해서 제압을 한 다음에 테이프로 일단 급한 대로 감아놓고는 그 위에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케이블로 다시 한번 감았다. 이 얘기는 지금 살아 있는 채로 팔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저항하지 못하게 만든 거다. 이렇게 이제 보이죠."]

[박지선 / 숙명여대 사회심리학 교수 : "피해자가 아는 사람이었다면 직접적으로 피해자의 목을 조른다든가 아니면 둔기나 예기 같은 도구를 써서 확실히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렀음을 확신하고 현장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이 돼서 이 사건이 면식범에 의해서 저질러졌을 가능성을 굉장히 낮다고 보입니다."]

[한성희 / 피해자 아들 : "주로 이 밑에다가 많이 숨겼었어요. 이 밑에다가."]

그렇다면 금품을 노린 범인이 할머니의 통장과 현금을 두고 간 이유도 설명이 됩니다. 범인이 통장과 현금을 일부러 두고 간 것이 아니라 끝내 찾지 못해 가져가지 못했다는 겁니다.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중요한 또 하나의 단서는 범행에 사용된 테이프의 출처입니다. 제작진이 테이프의 제조회사를 찾아 유통 정보를 추적했지만 13년 전 테이프의 정보는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범인을 찾아낼 또 다른 단서는 없는 걸까. 전문가들은 현장에 남겨진 전화선과 휴대전화 충전기선의 매듭에 주목했습니다.

[박지선 / 숙명여대 사회심리학 교수 : 피해자를 결박한 여러 군데의 매듭에서 반복적으로 비슷한 형태의 매듭이 보이거든요. 이러한 것들은 습벽이라고 우리가 하는 것이죠."]

올가미를 조였다 풀 듯 한쪽으로만 고리를 만드는 방식. 양쪽 줄을 교차해 묶으면 원의 크기가 고정되는 일반매듭과는 차이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매듭을 쓰는 특정 직업군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강압 수사 버티기 힘들었다"...초동수사부터 잘못 끼워진 첫 단추

이 사건에는 경찰이 초기 수사 과정에서 체포했던 또 다른 용의자가 있었습니다. 수사가 할머니가 살해된 지 한 달을 지나도 진전이 없을 무렵 평소 할머니와 가깝게 지내던 이웃 박 모 씨가 체포됐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커피잔의 립스틱 자국 때문이었습니다.
 
박 씨가 경찰 수사에서 범행을 자백했지만 당시 검찰은 구속영장을 기각하고 박 씨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할머니를 폭행하고 결박하기에는 박 씨가 할머니보다 왜소했고 범행도구도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증거라던 립스틱과 DNA도 그녀와 아무 연관이 없었습니다. 그럼 박 씨는 왜 거짓자백을 했을까.

[김완규 / 당시 담당 검사 : 어떤 스님이 집에 찾아왔더라. 그 스님이 그 죽은 할머니가 이 집 막내아들을 노리고 있다. 당신이 빨리 경찰서에 들어가지 않으면 아들이 죽는다. 빨리 들어가라. 그 직후에 경찰이 집에 찾아와서 (박 씨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허위자백을 했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건 박 씨를 찾아온 스님의 정체였습니다. 비구니 스님은 박 씨를 긴급체포한 형사의 친누나로 밝혀졌습니다. 박 씨는 취재진에게 그때 일을 떠올리기도 싫다며 진저리를 쳤습니다. 그때 자신에게 가해졌던 경찰의 강압 수사를 버틸 수 없었다고 박 씨는 털어놨습니다.

경찰은 할머니를 살해한 범인을 면식범으로 확신했습니다. 박 씨를 범인으로 몰았던 당시 담당 형사들은 지금까지도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경찰 관계자 :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게 없어요. (아니 당시에 수사하셨던 수사 당사자시니까)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그게 기억이 안 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지금 이야기 못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아니요. 말하기 싫어요."]

초동수사에서 잘못 끼워진 첫 단추. 어쩌면 경찰이 립스틱과 면식범에 집중하는 동안 놓쳐버렸던 단서들이 있는 건 아닐까. 어느새 계절은 또 바뀌어버렸고 할머니의 13번째 기일도 이렇게 지나가 버렸습니다. 아들 한성희 씨는 할머니를 살해한 범인이 영영 잡히지 않을까 두렵기만 합니다.

[한성희 / 피해자 아들 : "범인이 누군지 엄마는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나한테 얘기 좀 해줘요. 엄마 미안해. 엄마 정말 미안해."]

이제 사건을 해결할 마지막 열쇠는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테이프의 유통 경로와 매듭법뿐입니다.

할머니가 숨진 강원 지역에서 테이프를 유통했던 사람 또는 범인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매듭법을 봤거나 그렇게 끈을 묶는 직업군을 아는 분이 있다면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할머니를 위해 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일 겁니다.

     

정윤식 기자jys@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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