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志士들 구출하자".. 군중, 6km 떨어진 日헌병 분견소까지 추격

영동=김갑식 문화전문기자 입력 2019. 2. 27. 03:01 수정 2019. 2. 27.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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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제39화> 충북 영동
충북 영동군 매곡면 3·1독립운동의거 숭모비. 매곡의 3·1만세운동은 초기에는 평화롭게 진행됐으나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에 맞서 헌병대 분견소를 불태우는 등 격렬한 양상으로 바뀌었다. 영동=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봄이 오는구나 3월이 오는구나/잠든 산하를 흔들어 깨우면서/반가운 그님과 함께 오시는구나/…지금은 해방된 하늘과 땅/무거운 얼음을 깨뜨리면서/그님께서 쇠북으로 우시는구나/큰 소리 눈물로 우시는구나/해마다 3월이 오면/낯익은 골목마다/그님의 흰옷 그림자가 되살아나고.’

19일 찾은 충북 영동군 매곡면 3·1운동 의거 기념비. 눈비가 섞여 내리는 늦겨울 하늘이 기념비 한쪽의 시비(詩碑)에 새겨진 박희선 시인의 ‘해마다 3월이 오면’과 어우러졌다. 매곡초등학교 앞에 조성된 기념비 주변은 날씨 탓인지 인적이 끊겼지만 시의 한 구절처럼 잠든 산하를 깨우면서 100주년을 맞는 3·1절을 기다리고 있었다.

2017년 재연한 충북 영동군 매곡면의 3·1만세운동. 영동군 제공
○ 일제의 헌병 분견소까지 불태워

충청과 경상, 전라도의 접경지에 위치한 영동지역의 만세운동은 서울의 지도부 조직과 연결이 약해 자생성이 강했던 사례로 꼽힌다. 식민통치에 대한 반항의식이 바탕을 이룬 상황에서 일제의 농민에 대한 수탈과 강제 노역 등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전 군으로 확산됐다. 항일 의병운동을 일으킨 이들이 다시 3·1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만세운동은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처음에는 면사무소 등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평화적 운동으로 진행됐으나 일제가 야만적인 무력 탄압으로 주동 인물을 검거하고 살상하자 군민들은 경찰서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며 격렬하게 맞섰다.

매곡면의 3·1운동을 주도한 안준은 1897년에 태어나 15세에 황간학교에 입학하여 4년을 배운 뒤 농사일을 하면서 서당 훈장도 했다. 그는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됐는데 옥중에서 고문으로 병을 얻어 대구 동산병원에 입원하는 등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 뒤에 면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매곡의 만세 시위는 4월 2일부터 6일까지 이어졌다. 옥전리에 살던 안준은 독립선언서를 얻어와 안광덕과 본격적으로 거사를 준비했다. 이들은 400여 장의 태극기와 베껴 쓴 독립선언서를 들고 면 소재지인 노천리에 내려와 김용선 남도학 임봉춘 등과 논의하여 4월 2일 밤나무 묘포장의 부역꾼들과 면사무소 마당에서 거사하기로 했다. 당일 오전 11시경 부역꾼 100여 명과 각 마을에서 모인 300여 명이 합세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면장과 직원들도 만세운동에 가담하도록 했다. 일부는 마침 장날이었던 황간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4월 3일과 4일에는 군중 800여 명이 면사무소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때 추풍령 헌병 분견대가 출동해 주동 인물인 안광덕 임봉춘 남도학 등을 체포했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구속된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추풍령 헌병 분견소까지 추격했다. 6일에는 300여 명이 추풍령 분견소에 쇄도하였으나 밀고를 받은 헌병이 출동해 제지당했다. 이날 안준을 비롯해 장복철 안병문 김용선 신상희 등 4명이 체포됐고 이후 이장노 장출봉 김용문 등 8명이 추가로 일경에 잡혔다.

매곡면 3·1운동 애국지사숭모회장을 지낸 안병찬 씨는 “지형이 험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영동의 3·1운동은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집중됐다”라며 “정확한 기록으로 입증되지는 않지만 일제 헌병이 주둔해 있던 추풍령 분견소에 불이 났는데, 매곡 사람들 짓이라는 소문이 났다”고 전했다. 매곡 시위의 현장이었던 면사무소에서 추풍령 분견대까지는 6km 정도로 어른 걸음으로 1시간 거리였다고 한다.

이날 기념비를 살펴보던 안 씨는 “당시 시위 주동자 중 4명이 공주에서 옥고를 치렀는데 6·25전쟁 중 감옥이 불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독립유공자 지정에 어려움이 있다”며 “여러 증언을 토대로 지정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영동군은 올해 3·1절 100주년을 맞아 매곡면에서 진행해온 기념행사를 군 단위로 확대해 개최한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에 있는 7지사(志士) 독립운동 기념비. 영동군 제공
○ “조밥을 먹기도 힘든 때에 웬 뽕나무인가”

매곡면에 앞서 학산면에서 3월 25, 28일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곳 시위의 직접적 발단은 영동∼무주 간 도로 공사 강제 노역 동원 및 뽕나무 묘목 강제 배부 등 일제의 악랄한 수탈 정책이었다.

이때의 시위는 학산과 양산면민의 연합으로 전개됐다. 특히 3월 30일에는 학산면 소재지인 서산리에서 도로 공사 부역에 나섰던 군중이 양산면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경찰주재소에 돌을 던져 창문과 전화기를 파괴했다. 구속된 지사의 구출에 나섰지만 일본의 지원 병력이 출동하면서 7명이 체포되고 38명이 중상을 입기도 했다. 4월 3일에도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양봉식 이기영 전재득 정해용 이건양 전만표 등이 주도하다 검거됐다. 재판기록을 참고해 이날의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은 먼저 4월 3일 오후 4시경부터 6시까지 서산리 시장에서 약 300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시장을 누볐다. 오후 8시경에도 200여 명의 군중이 면사무소에 달려가 “조밥을 먹기도 힘든 때에 웬 뽕나무인가”라고 외치면서 임시로 심어놓은 2만8000그루의 뽕나무 묘목을 뽑아 불에 태웠다. 이들 중에서도 지도적인 역할을 한 양봉식은 경술국치 후 비분강개해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서간도로 망명했던 인물이다. 그는 1919년 2월 진남포를 경유해 독립선언서 수십 장을 얻어와 옥천 이원 금산 무주 등에 배포했다.

영동지역의 중심지인 읍내에서도 3월 말 영동 장날에 시장 남쪽의 다리 위에 사방 130cm의 태극기가 달려 있었고 여러 곳에서 종이로 만든 150여 장의 태극기가 나돌았다. 4월 4일 영동 장터에서 2000여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고 투석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위의 주동자는 박성하 한의교 정성백 장인덕 김태규 정우문 한광교 등 7인이었다. 이들이 장터에 흩어져 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은 호응하여 읍내를 누비며 행진했다. 놀란 일본 경찰은 강제 해산을 시도했다. 이때 일경의 발포로 6명이 죽고 8명이 크게 다쳤다. 1991년 영동읍 주곡리에는 이들의 뜻을 기리기 위한 7지사(志士) 독립운동 기념비가 세워졌다.

독립군 나무로 불리는 충북 영동군 학산면의 느티나무. 영동군 제공
○ 3·1운동에 힘을 보탠 독립군 나무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마을 입구에는 ‘독립군 나무’(영동군 보호수 제43호)로 불리는 느티나무가 있다. 높이 20m, 둘레 10m로 수령은 350여 년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는 원래 각각 떨어진 두 그루이지만 밑동이 붙어 자라면서 멀리서 보면 한 그루처럼 보인다.

이 나무가 독립군 나무로 불리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주민들이 나무에 흰 헝겊을 달아 일본 헌병의 동태를 살핀 데서 유래했다. 영동지역은 충북 옥천, 전북 무주, 경북 김천으로 통하는 지역이다. 이곳을 지나가야 했던 독립군들은 이 나무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면서 신변의 안전을 도모했다고 한다.

독립군 나무는 오랜 풍파로 쇠약했지만 영동군이 몇 년 전부터 보호 작업을 하면서 활력을 되찾았다. 영동군은 나무의 생육을 촉진하기 위해 밑동 주변의 흙을 걷어내고 영양제가 섞인 마사토를 새로 깔고 나무줄기에 영양제도 투입했다. 낡고 부서진 둘레석을 말끔히 정비하고 자투리 공간에 자연친화적 휴식공간을 설치했다. 최향숙 문화관광해설사는 “흥미로운 스토리를 간직한 독립군 나무에 대한 스토리텔링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라며 “3·1운동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발굴하고 전하는 것도 후손들에게 물려줄 중요한 문화자산”이라고 말했다.

영동=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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