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만 주목받는 더러운 세상"에 일침 가하는 김혜윤

민경원 입력 2019. 11. 9. 12:26 수정 2019. 11. 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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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원의 심스틸러]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 은단오
만화 속 엑스트라라는 사실 깨닫고
스스로 운명 바꿔나가는 강인한 역할
7년간 50여편서 다진 연기력 꽃피워
‘어쩌다 발견한 하루’에서 은단오 역할을 맡은 배우 김혜윤. [사진 MBC]
MBC 수목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여러모로 억울한 작품이다. 사립 명문고인 스리고의 꽃미남 3인방 A3가 등장하는 순간 F4가 자동 연상되면서 ‘꽃보다 남자’(2009)의 아류작이라는 굴레가 씌워지고, ‘열여덟의 순간’ ‘미스터 기간제’ 등 한동안 TV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학원물이 잇따라 편성되면서 신선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떼거리로 교복 입고 나오는 고교물은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편견도 시작 전부터 기대감을 낮추는 요인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시청자들의 간증이 쏟아지고 있다. 순정만화 여주인공 같은 삶을 꿈꿨던 은단오(김혜윤)가 실은 만화책 『비밀』 속 그 외 등장인물, 즉 엑스트라로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아를 찾는 여정을 향한 응원이 쇄도하는 것. 심장병도 모자라 백경(이재욱)을 10년 동안 짝사랑한다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설정값’도 안쓰럽지만 모든 순간 모든 대사가 전부 남녀주인공 오남주(김영대)와 여주다(이나은)를 위한 것이라니 벗어나고 싶을 수밖에.

은단오는 심장병이 있는 설정값 탓에 툭하면 쓰러진다. 하루(로운)가 구해주는 모습. [사진 MBC]
사실 “주인공만 스포트라이트 받는 더러운 세상”이 어디 만화 속뿐이던가. 일상에서도 잘난 주인공에 치여 조연은커녕 엑스트라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순간이 수두룩하고, 내가 가고 싶은 곳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자유는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극 중에서처럼 작가가 의도한 장면이 모인 ‘스테이지’와 그리지 않은 공간인 ‘섀도’가 나뉘어 있지 않더라도 우리 뜻대로 흘러가는 무대는 많지 않은 탓이다.

덕분에 시청률은 매회 최고 기록(18.8%)를 경신하고 있는 KBS2 ‘동백꽃 필 무렵’에 밀려 3~4%대로 고전하고 있지만 드라마 화제성은 1, 2위를 다투고 있다. 마치 내 얘기 같은 상황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몰입하고 있는 것이다. 정해진 설정값에 맞춰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던 주인공들이 한명씩 ‘자아’를 찾게 되면서 능동적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 이름도 없던 엑스트라에서 ‘하루’라는 이름을 갖게 된 SF9의 로운과 까칠함과 다정함을 오가는 백경 역의 이재욱도 출연자 화제성 상위권에 올라 있다.

은단오의 또다른 설정값은 백경(이재욱)을 10년간 짝사랑한다는 것이다. 자아를 갖게 되면서 은단오의 달라진 모습에 당황하는 백경. [사진 MBC]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은단오 역을 맡은 김혜윤(23)이다. 가장 먼저 자아를 갖게 된 그는 주위 사람들을 하나씩 각성하게 만드는 역할이다. 장면과 장면 사이의 공백을 느끼고, 언제 어디서 눈을 뜨게 될지 모르는 낯선 상황의 연속이지만 천연덕스럽게 소화한다. 주어진 설정값에 맞춰 길거리에서 쓰러져 있거나 병원 침대 위에서 일어나 눈물을 쏟을지언정 곧 진짜 은단오로 돌아와 운명을 바꿔보겠다는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다.

스테이지가 시작되는 ‘찰칵’ 소리가 날 때마다 180도 바뀌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진짜 만화책을 보는 느낌마저 든다. 무류의 웹툰 원작 ‘어쩌다 발견한 7월’을 보지 않은 사람도 무리 없이 만화적 문법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도울뿐더러 낯선 세계관에 보다 쉽게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돕는 셈이다. 매점에서 빵을 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은단오를 보고 “매번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묻는 하루의 대사처럼 그는 에너지를 있는 힘껏 쏟아부어 매 장면을 특별하게 만든다.

드라마 ‘SKY 캐슬’에서 서울 의대에 목숨 건 강예서 역할을 맡아 열연한 김혜윤. [사진 JTBC]
그는 “너무 빠르게 주연을 맡게 됐다”며 “과분한 역할”이라 칭했지만 실은 은단오 역에 김혜윤만큼 “마땅한 배우”도 없다. 올 초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거머쥔 ‘SKY 캐슬’의 강예서로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기 전까지 그는 영화와 드라마 50여편에 출연하며 안 해본 역할이 없을 정도로 단역부터 차근차근 올라왔기 때문이다. 2012년 데뷔한 걸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작품 숫자다. 이름 있는 역할의 소중함을, 대사 한 줄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한 장면도 허투루 쓸 수 없었을 테다.

건국대 영화학과 재학 도중 웹드라마 ‘전지적 짝사랑 시점’ 등 다양한 포맷의 콘텐트를 경험한 것도 연기의 진폭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홀로 에피소드를 이끌어가는 힘을 키우는 동시에 즉각적인 피드백을 얻을 수 있는 덕분이다. 그때도 누군가는 김혜윤이 “여주인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전형성에서 벗어나 있는 덕분에 앞으로 더 많은 역할을 품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엑스트라가 여주인공이 되고, 세상을 바꿔 가는 시대니 말이다. 평범한 엑스트라들이 만나 꾸며 나가는 ‘비범한(extraordinary)’ 순간을 응원한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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