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가 핑크 꼴통? 통합당이 예뻐서 찍었겠나"

이혜미 입력 2020. 5. 15. 04:33 수정 2020. 5. 15.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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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후 한 달, 대구를 가다]

21대 총선을 치르고 약 한 달 후인 지난 11일 대구 대표적 번화가인 중구 동성로 거리에 ‘대구 시민 하나되어 코로나19 이겨냅시다’라는 분홍색 현수막이 걸려 있다. 대구=이혜미 기자

“요새 대구 사람더러 ‘핑크 꼴통’이라 카면서 사람 취급도 안 한다카대. 서러워도 우짜겠습니까. 우리 빼고 온 세상이 퍼런데.”

11일 오전 대구 중구 서문시장을 39년째 지키고 있는 양말 도매상 김모(58)씨가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홍과 파랑은 각각 미래통합당과 더불어민주당의 상징색이다. 21대 총선의 지역구별 당선자를 표시한 지도는 온통 파랑으로 물들었지만, 대구ㆍ경북(TK)은 예외였다.

김씨도 통합당 후보를 찍었다. “대구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긴 했지만, 보수 전멸의 위기감 앞에서 흔들렸다고 했다. 인근에서 국수 노점을 하는 배상숙(70)씨도 거들었다. “대구는 무조건 통합당이지만, 어데 예뻐서 찍었겠나? 원체 비실비실하니까 우리라도 뽑아줘야 하지 않겠나 캐서 의리로 뭉쳤지.”

총선에서 대구 지역구 12곳은 전부 보수 진영에 돌아갔다. 통합당이 11곳에 깃발을 꽂았고, 나머지 1곳도 통합당 출신인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차지했다. 20대 총선에서 민주당 김부겸ㆍ홍의락 의원에 마음을 열었던 대구 민심이 돌아 앉은 건 순식간이었다.

대구는 수십 년 간 ‘대한민국 주류의 본산’이었다. 노태우ㆍ박근혜 등 대통령을 배출하고 정치ㆍ경제 권력을 장악하며 주류로 군림했지만, 영화는 어느덧 희미해졌다. 대구는 이번 총선에서 ‘정치적 갈라파고스’가 되는 길을 기꺼이 택했다. 총선으로부터 한달이 지난 지금, 대구 시민들은 어떤 마음일까.

11, 12일 본보가 대구 곳곳을 돌며 만난 시민들은 복잡다단한 감정을 토로했다. 울분과 체념, 박탈감, 소외감 등 온갖 정서가 엉켜 있었다. 그래도 일관된 메시지가 있었다. “통합당을 택하긴 했지만, 묻지마 지지를 보낸 건 절대로 아니다.”

◇‘위기의 보수’가 택한 방어적 지역주의

“대구 경제가 엉망인데, 호남에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몰리니까 박탈감도 느끼고 소외감을 안 느끼겠습니꺼.” 달서구 성서산업단지 내 중소기업 임원인 권모(56)씨는 대구 시민들의 마음을 ‘피해의식’으로 요약했다. 그는 “친 호남 정서를 가진 대통령이 나오면서 ‘경상도 정권’이 오랫동안 향유한 혜택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고 했다.

과거 대구를 지배한 지역주의는 중앙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패권적 지역주의’였다. 이제는 더 이상 추락하지 않기 위해 단단히 결속하는 ‘방어적 지역주의’가 표출되고 있다. 지역 주력 산업인 섬유ㆍ안경 등 산업이 쇠퇴하고 고부가가치 산업구조로의 재편에 실패하면서 대구의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은 1992년부터 지난해까지 26년째 전국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틀간 만난 시민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호명된 지역의 이름은 ‘수도권’이 아닌 ‘호남’이었다. ‘젊음의 거리’인 중구 동성로에서 만난 김윤환(34)씨는 “어르신들이 호남에 ‘광주형 일자리’나 제조업 공장이 들어서는 뉴스를 보고 ‘저기는 지어주면서, 왜 여기는 안 해주냐’는 박탈감을 쏟아내곤 한다”고 했다.

총선 이후 대구는 ‘마지막 지역주의의 섬’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서문시장의 김씨가 발끈했다. “대구보고 지역주의라고 뭐라카는데, 그러면 전라도는 민주당이 100% 싹쓸이한 거 아닌교? 그나마 대구라도 있었으니까 거대 여당을 견제할 세력이 만들어진 것이제!” 지역활동가 장종욱(28)씨도 항변했다. “통합당 후보는 이번 총선에서 전라도에 출마도 못했지 않습니까. 대구에선 그래도 민주당 후보들이 표를 꽤 받았고요. 전국이 파랑으로 도배되는 것이 과연 옳다는 건지, 대구를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저작권 한국일보]21대 총선이 약 한달 지난 11일 대구 중구 서문시장에 시민들이 마스크를 끼고 장을 보고 있다. 대구=이혜미 기자

◇ “박근혜 향수는 옛말… 보수도 쇄신해야”

“박근혜는 대구에서도 이미 흘러간 사람이에요.” 택시기사 이상용(72)씨의 말이다. 그는 “보수 진영에서 아무도 탄핵의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 반성도 쇄신도 하지 않은 게 통합당 참패의 원인”이라고 꼬집었다. 1,000일 넘게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인간적 연민을 느낄지언정, ‘박근혜’라는 이름이 더는 정치적 변수가 아니라는 게 대구의 정서였다.

대구 표심을 움직인 건 진보 진영 영구 집권에 대한 공포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총선 일주일 전 여권에선 ‘범여권 180석 석권’ 낙관론이 터져 나왔고, 통합당은 “정권 폭주를 막아달라”고 납작 엎드렸다. ‘문재인 정권이 국회를 장악해 사회주의 개헌을 하려 한다’는 통합당의 주장을 대구 민심은 진지하게 들었다. 대구마저 뒤집어지는 걸 걱정한 시민들이 투표소로 몰려 갔고, 대구의 투표율(67%)은 전국 평균(66.2%)을 뛰어넘었다.

지난 대선에선 문 대통령을, 20대 총선에선 김부겸 의원을 뽑았다는 수성구민 이모(44)씨는 “통합당이 문제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지만, 한쪽으로 힘이 쏠리면 더 큰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주호영 의원을 뽑았다”고 했다. 회사원 서모(48)씨도 “수도권에서 민주당이 압승한다는 얘기가 들려 오니 대구 사람들이 뭉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대구의 속내는 통합당을 감싸기보다 꾸짖는 쪽에 가까웠다. 북구 칠성시장 상인회장인 김문진씨는 “뼈를 깎는 쇄신과 혁신이 없다면 대구 시민들이 언제까지 통합당을 지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잘라 말했다.

변화의 목소리도 조금씩 터져 나왔다.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 만난 민주당 지지자 박현주(55)씨는 말했다. “대구가 당분간 정치적 고립을 피할 수는 없겠지예. 그래도 정치인 세대 교체가 이뤄지면 틀림 없이 변할 겁니다. 우리도 지역주의에 그만 휘둘리고 싶습니다. 다만 인물과 정책을 보고 투표할 수 있는 정치적 토양이 만들어지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대구=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mailto: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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