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역서 김밥 팔던 10살.." 6억 기부한 92세 할머니의 나눔 인생

문지연 기자 2022. 1. 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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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자 할머니가 지난달 3일 '2021 기부·나눔단체 청와대 초청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김정숙 여사와 성금을 기부하는 모습. /뉴시스

“구순이 넘는 육신과 이미 모든 것을 기부했다는 사실만큼 당신을 완벽히 증명하는 것이 없었다.”

남궁인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지난 연말 청와대 초청행사에서 만난 박춘자(92) 할머니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박 할머니를 ‘성자’(聖子)와 다름없다고 표현했다.

남궁 교수는 3일 페이스북 게시물에 박 할머니를 향한 존경을 담았고, 짧은 글로는 다 할 수 없는 사연을 공개했다. 그는 먼저 지난달 3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마주한 박 할머니를 떠올렸다.

당시 행사는 연말연시를 맞아 구세군, 굿네이버스, 세이브더칠드런, 유니세프 등 주요 기부단체와 기부자들을 초청해 격려하는 자리였다. 가수 인순이, 배우 이광기, 방송인 안현모 등도 참석했다. 박 할머니는 남한산성 길목에서 김밥을 팔아 모은 전 재산 6억5000만원을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등에 전달한 기부자로 소개됐다.

남궁 교수는 “대통령, 영부인, 비서실장, 단체의 이사장, 유명 연예인 틈 왜소한 체격의 구순 할머니. 그 대비는 너무 뚜렷해서 영화나 만화 속 장면 같았다”며 “할머니 차례가 되자 대통령 내외는 직접 할머니를 부축하러 나갔다. 영부인의 손을 잡은 할머니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고 회상했다.

이어 “할머니는 온전히 남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 단순히 금전뿐 아니었다. 스무살 전에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당해 가족 없이 살던 할머니는 40년 전부터 길에 버려진 발달 장애인을 가족처럼 돌봤다”며 “셋방을 뺀 보증금 2000만원마저 기부하고 예전 당신이 기부해 복지 시설이 된 집에서 평생 돌보던 장애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할머니가 청와대에 초청받아 영부인 손을 붙들고 우는 장면은 어느 드라마 같았지만 현실이었다. 지극한 현실이라 오히려 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며 “우리는 먹먹한 표정으로 회담장으로 향했다. 이후 할머니의 발언 차례가 되었고 모두는 어떤 부채감으로 할머니를 바라봤다. 할머니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발언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가 전한 당시 박 할머니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박춘자 할머니와 행사 참석자들이 간담회장으로 이동하는 모습. /뉴시스

“저는 가난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어머니가 없었고 아버지와 근근이 힘든 삶을 살았다. 돈이 없어 배가 고팠고 배가 고파 힘들었다. 열 살부터 경성역에 나가 순사의 눈을 피해 김밥을 팔았다. 그렇게 돈이 생겨 먹을 걸 사 먹었는데, 먹는 순간 너무나 행복하고 좋았다. 그게 너무 좋아서 남한테도 주고 싶었다.

나누는 일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었다. 그렇게 구십이 넘게 다 주며 살다가 팔자에 없는 청와대 초청을 받았다. 방금 내밀어 주시는 손을 잡으니 갑자기 어린 시절 제 손을 잡아주던 아버지의 손이 생각났다. 그래서 귀한 분들 앞에서 울고 말았다. 죄송하다.”

남궁 교수는 “그 자리 많은 사람 또한 치열한 선의로 살아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높은’ 무엇인가가 있었고 앞으로도 일정 지위의 삶을 영위할 것이 분명했다”며 “하지만 할머니는 그 따뜻한 손을 나눠주기 위해 자신이 얻은 모든 일생을 조용히 헐어서 베풀었다. 그 패배가 너무 명료해 ‘봉사’라는 명목으로 모인 사람들은 그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기분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면서 “어떤 한 생은 지독하고도 무한히 이타적이라 무섭고 두렵기까지 하다. 그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존재를 직면했을 때 경험하는 경배일 것”이라며 “설레는 마음으로 청와대에서 조우한 것은 화려한 건물이나 높은 사람들도 번듯한 회의도 아니었다. 범인으로는 범접하기 어려운 영혼이 펼쳐놓은 한 세계였다”고 덧붙였다.

그의 글로 재조명된 박 할머니 사연에 네티즌들은 감동적이라는 반응을 쏟아냈다. 한 네티즌은 “부끄러움과 감사함으로 새해를 시작하게 됐다”며 “행복은 멀리 있지 않음을 깨닫는 한 해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썼다. 이외에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할머니를 보고 내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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