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청와대 터, 유원지로 전락..'창경원 판박이' 되나

노형석 입력 2022. 7. 14. 08:05 수정 2022. 7. 1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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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집무실 이전 논란]문체부, 공연장 등 문화공간 구상
문화재청 국가사적 지정 '급제동'
전문가 "고려부터 역사 담긴 공간"
개방위주 위락공간화 정책 비판
5월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 개방 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이 청와대 경내 문화유산인 오운정을 둘러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결국 ‘창경원의 판박이’가 될 것인가?

일제강점기와 독재정권 시절 경관이 망가진 채 유원지로 격하됐던 근대 창경원의 악몽이 지금 문화재계를 떠돈다. 조선왕조의 정궁 경복궁의 정식 후원이었고, 지난 83년간 나라 안 최고 권력자의 거처였던 서울 세종로 청와대 영역의 장래를 놓고 난기류가 일고 있다.

지난 5월10일 청와대 권역이 개방된 지 두달이 지난 현재 입장객수가 100만명을 넘어서는 등 대중의 관심은 뜨겁다. 그러나 대통령실이 두 달이 지나도록 장래 공간 활용에 대해 어떤 방침도 공표하지 않아 전시시설 경내 문화유산과 시설 훼손 등 무분별한 관람 행태가 거듭되고 있고, 임시관리처인 문화재청과 상위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는 활용 방안에 대해 뚜렷한 견해차를 보이면서 갈등을 빚는 중이다.

5월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개방 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이 춘추문으로 들어서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한겨레>가 문체부와 문화재청을 취재한 결과 문화재청은 지난 5월23일 대통령실에 의해 임시관리 주체로 지정된 뒤 청와대 영역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밝히기 위해 주요 경내 문화유산의 일제 조사와 국가사적 지정 등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문체부가 미술관과 공연장, 도서관 등 시민 위락문화시설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구상을 내세워 사적 지정 추진에 반대하는 등 제동을 걸고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문체부는 더 나아가 청와대 구역의 관리 및 재활용을 부처 산하 국장급 관리단이 총괄하고 문화재청의 역할은 문화유산 구역 보존관리와 천연기념물·등록문화재 지정 등의 현안만 협의하는 쪽으로 축소하는 안을 준비 중이며, 이를 20일 윤석열 대통령에 업무 보고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청 쪽의 관계자는 “터의 시설 건립과 활용이 크게 제약받는 국가사적 지정을 문체부는 극력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5월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 개방 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이 청와대 경내 문화유산인 침류각을 둘러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와 관련해 문체부 고위 관계자들은 박보균 장관이 취임한 지난 5월 중순 이래 지속적으로 문화재청 국실장 간부들과 업무 협의를 내세워 접촉하면서 청와대 구역의 총괄 관리권 등을 문체부와 긴밀하게 협의하라고 요구해온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박 장관은 취임 직후부터 문화재청 쪽에 문체부가 주도하는 청와대 복합문화공간화 구상을 전달하면서 협조를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화재청 쪽은 “계속 협의를 진행 중이어서 확정된 부분이 없다”며 공식 언급을 아꼈다. 하지만, 일부 문화재청 실무자들과 문화재위원 등의 전문가들은 강하게 반발하는 분위기다. 문체부가 독립 외청인 문화재청을 제쳐놓고 사실상 청와대 권역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무시하는 위락공간화 구상을 밀어붙이려 한다는 것이다.

5월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 개방 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이 청와대 경내 문화유산인 오운정을 둘러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실제로 문화재청 산하 청와대국민개방추진단은 원래 지난 4일 ‘청와대의 지속가능한 보존을 위한 관리 및 연구조사 추진’이란 제목으로 청와대 문화유산·자연유산의 상시관리 강화, 기초 조사 연구, 문화재 지정 등록 등 본격 추진을 뼈대로 하는 보도자료를 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날 박보균 장관이 기자간담회에서 청와대 문화복합공간화 구상을 언급하자 배포를 무기 연기시켰다. 장관의 언급은 청과는 사전 조율이 없이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청 대변인실은 자료 보완 등의 이유로 연기된 것이라고 밝혔지만, 청의 관리 방침과 결이 다른 장관의 언급이 나오자 조율하기 위해 배포를 미룬 것이라는 게 내부 관계자들의 말이다. 문화재위원회의 현장 답사가 개방된 지 한달이 훨씬 지난 6월 중순 이뤄진 것도 문체부의 압박성 기류가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5월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 경내 문화유산인 석조여래좌상의 모습. 공동취재사진

문화계에서는 실제 청와대 땅의 소유권자인 대통령실이 개방 두 달이 지나도록 터의 유산적 가치와 보존 방침에 대해 함구한 채 개방만 채근하는 상황이 문제를 키웠다고 지적한다. 건축사가인 이강근 서울시립대교수는 “청와대 권역은 고려시대 남경 별궁부터 조선시대 정궁 후원을 거쳐 21세기 대통령 권부까지 1000년 가깝게 권력의 핵심을 유지한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특이한 공간이다. 역사성을 찾고 회복시키는 과정이 전제되지 않은 개방 위주의 위락공간화 정책은 문화재계는 물론 문화계의 저항과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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