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내용담은 <뮈텔 일기>와 <조선

입력 1990. 3. 20. 15:09 수정 1990. 3. 2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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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통신문> 국내 최초 공개 (서울=연합(聯合))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伊藤博文을 암살한 이후 한국 천주교가 그의 의거를 보는 시각과 당시 황실과 국민들의 반응들을 상세히 알아볼 수 있는 문건의 내용이 최초로 공개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문건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안중근(安重根) 의사 서거 80주년을 맞아 26일 정식 발간하게 될 「안중근(도마)의사 추모자료집」에 수록된 <뮈텔 일기>와 <조선교구 통신문>.

<뮈텔 일기>는 安의사의 거사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가 쓴 일기로서 이번에 공개된 부분은 그의 일기 중 安의사와 관련된 것이다.

이 일기는 安의사가 하얼빈역에서 伊藤博文을 저격,살해한 날인 1909년 10월 26일부터 安의사가 1910년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한 달 위인 4월 30일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이 일기의 내용에는 뮈텔 주교가 安의사 사건을 보는 시각과 심경 등이 속속들이 기록돼 있다.

또 <조선교구 통신문>은 당시 한국에 주재하던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프린트물로 간행,돌려봤던 것으로 이 역시 安의사 관련부분만 이번 공개됐는데,시간적 배경은 암살 당일(10월 26일)로부터 이듬해 8월 9일까지로 잡고 있다.

이들 문건에 따르면,安의사의 거사로 조선황실을 매우 난처한 입장에 빠져 황제가 직접 통감부를 찾아가 사과하는 한편 왕자 등을 일본에 파견,애도를 표시함과 동시에 13만 달러의 조의금을 일본측에 전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뮈텔 일기> 10월 28일자는 "황제께서 오후 3시경 통감부로 위로의 방문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교구 통신문> 10월 29일자는 "황제는 장인 尹德榮과 趙民熙,그리고 왕자 의화군을 일본으로 보냈다.또한 애도의 표시로 모든 학교들로 하여금 3일간 휴교하게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같은 날자 <조선교구통신문>은 伊藤博文의 "국장(國葬)을 위해 한국황제가 3만 달러를 내놓았다"고 기록하는가 하면 11월 4일자(伊藤博文의 장례식은 11월 5일)는 "전 한국황제(고종(高宗)을 지칭하는 듯)는 아침 10시 통감부를 방문하고 하르빈에서 총탄에 쓰러진 그의 동료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뜻을 전했다"고 쓰고 있어 합방을 앞두고 한국정부가 완전히 허수아비로 전락해 있었음을 간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선교구통신문은 또 △11월 4일 현재 伊藤博文의 죽음을 애도하는 전보가 무려 9만여통에 이른다는 것(11월 4일자)△몇몇 한인들이 서울에 큰 伊藤博文의 동상을 세우기로 하고 단체를 결성했다는 것(11월 12일자) △한국정부가 伊藤博文 공작을 잃은 것을 몹시 비통해 하면서 일본 제일은행을 통해 10만 달러의 돈을 보냈다는 것 등 당시 황실을 비롯한 한인지배계층의 반민족성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뮈텔 일기>와 <조선교구 통신문>은 또 安의사의 거사에 대해 천주교의 성직자들은 지극히 못마땅해 했으며 그중 일부 신부만이 그의 거사를 긍정적으로 평가,安의사를 도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뮈텔 주교는 <뮈텔 일기> 10월 27일자에서 "그(伊藤博文을 지칭)의 공적들,조선제국에 가져다준 현실적인 이득에도 불구하고..."라고 언급,기본적으로 그의 시각이 친일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安의사가 체포된 후 그가 천주교 신자라는 보도가 나오자 그는 이를 극구 부인,당시 천주교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安의사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서울 프레스」지에 보도되자 뮈텔 주교는 10월 29일 "일본·한국신문들이 똑같이 伊藤博文 공작을 죽인 한국인 암살자가 천주교도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어떤 천주교도도 살해사건과 관련돼 있지 않으며 천주교는 어떤 형태로도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의 항의문(조선교구통신문 10월 30일자)을 서울 프레스 편집국장 앞으로 발송,安의사와 천주교는 무관함을 주장했다.

14세 때 프랑스인인 빌렘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아 '도마'(多默)라는 세례명을 갖고 있었던 安의사는 뮈텔 주교에게 그의 죽음임박을 알리고 마지막으로 신부 한 명을 보내줄 것으로 간청(<뮈텔 일기> 2월 14일자)했으나 뮈텔 주교는 이를 거절(<뮈텔 일기 2월 15일자,16일자)했다.>

이에 安의사 가족들은 빌렘 신부를 보내달라고 또다시 청원(<뮈텔일기> 21일자) 하게 되나 뮈텔은 '아주 심각한 이유'를 들어 역시 외면해버렸다.

安의사에게 세례를 주었던 빌렘 신부는 이를 보다 못해 安의사의 사형집행 24일을 앞둔 3월 2일 자신의 旅順행을 알리는 편지를 뮈텔 주교 앞으로 보낸 후(<뮈텔 일기>3월 4일자) 安의사에게 달려가기에 이르렀다.

<뮈텔 일기>3월 15일자는 "나는(뮈텔) 그의(빌렘) 불복종으로 해서 불가피하게 내려진 징계를 그에게 선포해서 보냈는데 그것은 2월간 미사의 주재를 정지하는 내용이었다"고 기록,빌렘의 旅順행에 대해 심기가 심히 불쾌했음을 드러내주었다.

또 <뮈텔 일기> 10월 27일자는 "伊藤博文의 암살사건은 일본인과 몇몇 친일파 조선인에게만 공포를 일으켰을 뿐 일반 민중들은 기쁨으로 그 소식을 받았다"고 기록,황실과 일부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국민 모두가 安의사의 거사를 통쾌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이들 문건은 당시 전국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반일 독립운동상도 소개했는데 의거 당일만 해도 "전라도 남부에서 날쌔게 피해다니는 의병들을 몰아내기 위해 파견된 와타나베 장군이 전투에서 한국인 1천55명을 포로로 잡고 3백74명을 죽였다"고 조선교구통신문 10월 26일자는 적고 있다.

역시 조선교구통신문 11월 1일자는 "한국의병들과 일본군은 한국에서 1년 동안 에 9백76번의 접전을 가졌다"고 기록,황실과 일부 친일관료와는 달리 민중들의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이 치열했다는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다.

安의사가 거사 후 보인 의연한 모습을 언급한 부분도 자주 눈에 띄는데 조선교구통신문 11월 7일자는 "지금까지 안중근(安重根)은 괴롭다거나 후회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얼굴,말,행동,표정 모두 의무를 완수한 만족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르빈에서 체포될 때 그는 몇 번이고 되풀이 해서 '이토오는 죽었는가?라고 물었다.이토오가 죽었다는 대답을 들려주자 그는 '하느님 감사합니다.그는 사라졌습니다'하고 외쳤다"고 적었다.

또 같은 통신문 12월 5일자는 일본의 한 신문보도를 인용,"안중근(安重根)은 감옥에서 자기 공범들과는 달리 슬픈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며...중략...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감옥에서 안중근(安重根)은 매일 기도를 드리고 있으며 짐 속에 가지고간 성화(聖畵)들을 벽에 붙여놓았다"면서 그의 담담하고도 비장한 최후를 전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 추모자료집」은 이밖에 안중근(安重根) 의사를 가장 가깝게 모셨던 사람 중의 하나인 류동선 할머니(83)의 회상기도 국내 최초로 게재하고 있어 눈길을 모으고 있다.

<안중근과 그의 동료들>이란 제목의 이 글은 류 할머니의 아들인 김파씨(중국 연변의 조선족 역사학자)가 어머니의 회고담을 정리한 것으로 지난 85년 연변조선족 자치주에서 발행되는 잡지<송화강> 3월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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