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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日耆씨가 밝힌 가문내력.蕙琅씨 소설.빨

입력 1996. 02. 16. 00:00 수정 1996. 02. 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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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산활동>

(서울=연합(聯合)) 북한 金正日의 전처(前妻) 成蕙琳씨(58)의 친오빠인 成日耆씨(62)는 15일 오후 6시부터 3시간동안 자택에서 기자들과 만나 자신과 蕙琅(60),蕙琳씨 등 두동생을 포함한 집안의 내력과 蕙琅씨의 소설,자신의 빨치산 활동 등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털어놨다.

시종 상기된 표정의 成씨는 특히 만석꾼을 자랑하던 과거 집안의 富와 자신의 빨치산 활동을 설명할 때는 지나간 과거가 생생한 듯 상기된 표정이 역력했다.

成씨는 이번 탈북사건과 관련,"북한사회의 내적 모순을 드러낸 것으로 체제 붕괴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고 나름대로 진단하면서 " 16일이 金正日 생일인데 金이 악이 바쳐서 (두동생을 잡기위해) 온갖 수단을 다하지 않겠느냐"고 내내 이들의 안전에 대해 걱정했다.

◇ 가문내력

경남(慶南) 창녕군(昌寧郡) 대지면 석리가 집안이 대대로 살아온 고향인데 成씨 집안은 석동집으로 불렸다.

보리 2모작까지 합치면 1만6천석의 만석꾼이었으며 가장 잘 살때인 1930년대에는 비행기를 전세낼 정도였다.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축적된 집안의 부는 일제시대 지주였던 큰 아버지 때 최고에 달했다.

해방직후부터 6.25 동란 이전까지 장택상,박헌영,이태준,김태준,이승엽,허헌,이주화,이강국,백남운,박문규,정낙종,조두헌,시인 모윤숙씨의 후배인 김수임씨 등 유명인사들이 집안을 드나들었다.

장택상씨와는 친척관계로 그의 서울 종로구 수표동 집에도 여러차례 놀러갔고 그와는 6.25 전쟁후에도 많이 만났다.박헌영씨도 成씨집에 자주 왔었다.

집안은 창녕 成씨 흥양공파로 할아버지 成樂文씨 아래 윤경,有慶 두 아들이 있었고 부친 有慶씨는 1남5녀를 낳았다.

작은 할아버지 成樂敎씨는 아들이 없었던 관계로 부친 有慶씨가 그 집에 입양을 갔고 그래서 호적상으로는 成樂敎씨의 아들로 돼있다.

어머니 金원주씨는 후처였는데 본처인 아석현씨(가명)와 아버지 사이에 和 子,蕙珠,稀珠 등 세딸이 있었다.

후처인 어머니 사이에서 서방으로 탈출한 두동생과 같이 태어났다.

시인 모윤숙씨는 어머니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아내는 이화여대 생물과 2년을 마친 뒤 의대로 전과하려다 실패해 중퇴했다.

成씨는 지난 74년 원단을 수출하는 성일산업이라는 무역업체를 차려 76년 당시 수출액이 2백만불,종업원 3백90명으로 국내 자수직물업종중 가장 성가를 누린 업체중 하나였는데 친구를 도와주다 일이 잘못돼 부도를 냈다.

◇ 蕙琅씨의 소설

蕙琅이 탈고한 소설은 낙동강 이서(以西)지방의 崔씨 가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朴景利씨의 소설에 못지않을 것 같다.소설의 연대는 30년대부터 탈출시점인 지금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토지가 朴씨의 필력에 의존해 쓰인 소설인 반면 동생의 소설은 필력이 다소 떨어지겠지만 봉건집안의 몰락을 사실적으로 쓴 소설이다.

신세대교육을 받은 어머니와 좌경사상에 감염된 아버지 有慶씨와,그리고 成씨의 빨치산 활동,蕙琳씨가 북으로 넘어가서 金正日과 있었던 비화 등을 담아냈다.

◇ 빨치산 활동

49년 2월16일 월북,아버지의 친구인 朴문규씨 집에서 3개월동안 지낸뒤 5월께 강동정치학원 강사로 있는 어머니를 만났다.

그리고 회령 제3군관학교(교장 吳진우)에 1기생으로 입대해 훈련을 받고 6.25 직전 강원도(江原道) 철원 사창리에 있는 연선 빨치산으로 편입(766부대)해 실습을 받다 경기 가평 화악산,명지산,매봉 등지에서 활동했다.

50년 6월24일 강원 양양을 출발해 경북 울진에 도착, 활동하다 창녕에 있는 집에 잠시 들렀다 체포됐다.

당시 남도부 부대에 있었는데 `차진철'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빨치산 노래와 가고파,목동의 노래,산유화 같은 노래들도 빨치산 활동을 하며 불렀던 기억이 난다.

당시 함께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거의 죽었다.

옛날 한강가에서 투신한 여자로 유명한 池춘란이란 `빨로(팔로군)'출신 여자도 함께 활동했다.

成씨가 역임한 최고 직책은 대좌,즉 지금으로 말하면 대령이었는데 휘하병력이 가장 많을 때는 2백50명이었다.

그러나 보위부에서 정해준 정식계급은 아니었고 급박한 상황에서 현장에서 주어진 계급이었다.보급투쟁은 주로 울산의 얼음골,남명리 등지로 기습적으로 나가곤 했

다.

成씨가 속한 부대는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서 가장 오래 버틴 부대였다. 체코,유고에서도 예전에 成씨 부대를 많이 연구한 것으로 알려졌다는 것. 탄약은 주로 탈취해서 사용했고 독일제 모젤권총과 칼빈총을 사용했으며 물자는비교적 풍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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