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궁 대신 청와대로

입력 2003. 12. 3. 02:02 수정 2003. 12. 3.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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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실미도 북파부대는 어떻게 조직되고 어떻게 버림받았나 “박정희 목 따러왔수다.” 1968년 1월21일 밤 휴전선을 넘어 청와대로 진격하다가 남쪽 군인・경찰에 진압된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무장게릴라 31명 가운데 유일한생존자였던 김신조씨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발언을 계기로 사회전체가 반북 분위기로 똘똘 뭉쳐졌고, 박정희 정권은 ‘전 사회의 병영화’를 위한토대를 닦기 시작했다. ‘향토예비군’이 창설됐고, 고등학교에도 ‘교련’ 시간이생겨났다.

그리고 그해 4월 이른바 ‘실미도 사건’의 발단이 된 김일성 주석궁 폭파부대가인천 앞바다 무의도의 부속섬인 실미도에 창설됐다. 북쪽의 군사모험주의에 남쪽이똑같은 수준의 군사모험주의로 대응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실미도 부대’가극단적인 남북 군사 대결의 결정판으로 일컫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실미도 부대(정식 명칭은 ‘2325 전대 209 파견대’로1968년 4월에 창설됐다고 해서 ‘684부대’로 불리기도 했음)는 김형욱 당시중앙정보부장과 이철희 중앙정보부 제1국장 주도로 1・21사태에 대한 직접 보복을목표로 공군정보부대 산하에 만들어졌다. 육군과 해군의 경우 북파를 위한 수송수단이 없다는 이유로 중도에 해체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특수부대는 김일성주석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을 목표로 만들어진 점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일반적인북파 공작원 부대와는 또 다른 측면을 띤다.

실미도 북파부대는 철저하게 ‘김신조 특공대’를 염두에 두고 구성・운용됐다.

인원을 김신조 특공대와 똑같이 31명으로 구성한 것만 봐도 그렇다. 이들은 심지어산악구보를 하더라도 “김신조 부대의 기록보다 1초 더 빨라야 한다”는 목표를세워놓고 훈련했다고 한다. 훈련병들이 ‘인간살상병기’로 길러지는 동안 각종사건・사고로 31명의 훈련병 가운데 7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데탕트 분위기와 남북 화해 무드가 무르익으면서 북파의가능성이 줄어들면서 실미도 부대는 점점 파국으로 치달았다. 지옥훈련에 따른인권 유린, 형편없는 지원, 떨어질 대로 떨어진 부대의 사기 등이 겹쳤지만,부대의 앞날이나 훈련병들의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만들어진 지 3년4개월 만인 1971년 8월23일, 일요일 새벽을 틈타 훈련병들은평양이 아닌 서울로 진격할 것을 결정했다. 훈련 도중 살아남은 24명(이 가운데한명은 실미도 현장에서 사망)의 훈련병들은 자신들의 훈련을 담당했던 기간병과일부 간부들을 사살한 뒤 배를 타고 인천 송도로 숨어들었다. 송도에서 시내버스를탈취한 이들은 서울 대방동까지 진출했지만, 출동한 군・경과 교전하다 버스안에서 수류탄을 터트려 자폭했다. 여기에서 생존한 4명은 이후 군사재판을 거쳐총살당했다.

실미도 사건에 대한 수사기록과 공소장, 판결문 등은 여전히 군사기밀로 분류돼열람조차 불가능하다. 김중권(현 민주당 최고위원)씨는 당시 공군본부검찰부장(대위)으로 사건의 재판에 깊이 간여해 이 사건의 전말을 비교적 소상히알고 있는 인물로 손꼽힌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유족들에 대한 보상 등이 전혀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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