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김일성-홍명희家에 얽힌 비화

2004. 2. 10. 09:3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연합뉴스) 정준영기자= "북한 김일성-김정숙 부부는 홍명희 일가에 세간채로 집을 물려줬고 56년 그가 양반 출신의 인텔리(인텔리겐치아)라는 이유로 위기에 몰렸을 때 반일애국자라며 감싸줬다." 북한 무소속 대변지인 `통일신보" 최근호(1.24)에 김일성 주석 가족과 월북작가벽초 홍명희 집안 사이에 얽힌 장문의 일화가 게재돼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에피소드의 필자는 벽초의 며느리인 정경완(84.평양 대동강구역)씨. 정씨는충남 천안군 목천면에서 태어나 벽초의 아들로 반일운동을 하던 서른두살의 홍기무와 결혼했다. 정씨는 이 글에서 밝히지 않았지만 50년 납북된 국학자인 위당 정인보선생의 둘째딸이다.

홍명희 집안은 예부터 솝꼽히는 명문가로 알려져 있다. 북한에서도 그의 아들홍기문은 이조실록을 완역한 유명 국학자이고 홍기무도 북한 사회과학원 소장을 역임했다. 손자인 석형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함경북도당 책임비서이고 석중은`황진이"를 쓴 소설가다.

정씨는 58년 5.1절 행사가 끝난 뒤 김일성 주석이 평양시 교외의 호수에서 벽초와 함께 뱃놀이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을 `가보"(家寶)라며 지면에 공개하고 월북과정과 김일성-김정숙 부부,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그는 글 말미에 서울에 있는 동생들이라며 정양모ㆍ양완씨를 언급했다.

현재 문화재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중인 정양모(70)씨는 "그동안 누이의 소식을알려고 노력했지만 아직까지 확인을 못했었다"면서 "누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해기쁘다"고 말했다.

정씨가 실은 글을 요약해 재구성해 봤다.

『48년 4월. 그때 서울의 어지러운 정계에서 민주독립당 당수로 있던 시아버지홍명희는 어느 날 남편 홍기무가 소중히 전해주는 명주천을 받아들고 놀랐다. 그 천은 김일성 주석이 남북조선 정당ㆍ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가하라고 보낸 초청장이었다. 이튿날 새벽 시아버지는 남편을 데리고 평양으로 향했다. 얼마후 돌아온 남편의 전언에 따르면 시아버지와 남편이 회의가 진행되던 모란봉극장에 도착,휴게실로 안내되자 김일성 주석이 나와 참말 반갑다면서 시아버지의 건강과 서울의우리 집안 형편을 물은 뒤 연석회의 취지를 설명했다. 김 주석은 연석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시아버지를 주석단에 앉히고 연설까지 하게 했다. 또 며칠 뒤 시아버지가북조선에 남고 싶은 의향을 말했을 때 잘 했다면서 "새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민족문화도 건설해야 합니다. 민족문화건설을 위해 할일이 많습니다"라고 말했다.

김 주석은 48년 7월초 시아버지를 자기 집으로 불러 생일연을 차려줬고 기념으로 양복도 한벌 줬다. 공화국이 창건됐을 때는 내각 부수상의 중책을 안겨줬다. 또일부 그릇된 자들이 모해를 꾸밀 때도 시아버지를 보호해줬다. 56년 8월에 일부 사람들이 시아버지에 대해 양반 출신의 인테리를 데리고 어떻게 혁명할 수 있겠냐며공격하고 나섰을 때도 홍 선생의 성분이 어떻단 말인가, 과거 `림꺽정"을 썼으면 또어떻단 말인가, 왜정세월에 일본과 타협하지 않았으니 애국자가 아닌가, 그리고 8.15 후에 제국주의 편으로 따라가지 않고 우리를 찾아왔지 않았느냐 하며 요직에서 계속 일하도록 신임을 안겨줬다.

김 주석은 48년 8월 우리 가족을 평양으로 불렀다. 우리 일가는 몇차례에 나눠북에 왔다. 나는 남편을 도와 남북총선거에 참가하는 남조선 대표들을 선출하는 사업에 관여하느라 늦게 평양에 도착했다. 대동강 기슭 2층 집에 살림을 펴고 있었는데 김정숙의 배려로 방마다 비단이불이 쌓여 있고 부엌에는 독마다 쌀이 가득했다.

김정숙은 천과 재봉기까지 보내왔다. 나는 재봉기로 시어머니와 시누이들, 시형(시아주버니)네 가족들, 우리 애들이 입을 옷을 지었다. 또 스무 명이 넘는 우리 가족이 함께 사는데 불편할까봐 자신들의 댁을 가장집물(세간살이)이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내줬다.

시아버지가 68년 3월 81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김 주석은 직접 찾아와고인의 영구 앞에서 눈굽(눈 가장자리)을 닦으며 비감을 억제하지 못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훗날 애국열사릉에 시아버지 유해를 안장케 했다.

여러번 김정숙을 만났는데, 그럴 때마다 어린 김정일 위원장은 석화(필자의 맏아들)의 어머니라며 나를 더 가까이 내세워주곤 했다. 나는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뒤에도 15년간 시아버지를 모셨다. 김정일 위원장은 남편 홍기무에게 사회과학원 소장의 중책을 맡겼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조국통일상도 받도록 했다. 시형인 홍기문에게도 사회과학원 부원장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겸임토록 하고 조국통일상도 줬다.』(사진있음) prince@yonhapnews.co.kr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