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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아들' 평택 만기사 원경스님

입력 2004. 06. 02. 10:18 수정 2004. 06. 0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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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굴곡의 현대사가 옭아맨 삶방황끝에 한줄기 깨달음 얻어 외할아버지는 애비가 누군지도 모를, 백일도 안된 핏덩이를 놔둔 채 그 어미의머리채를 휘어잡고 끌고갔다. 그 핏덩이가 자라 어미를 처음 본 것은 23살 때였다.

수덕사 말사인 정혜사에 거처할 때였다. 계를 받은 지 3년째인 1963년이었다.

정신이 아뜩했다.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밥을 해 올린 뒤 그는 뒷문을 통해도망쳤다. 얼마되지 않아 그는 원주 영천사에서 극약을 먹고 신음하는 채로발견됐다. 14일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여섯살 때였다. 그해 6번 정도 봤다. 그뒤로는 한번도보지 못했고 소식도 못들었다. 지하활동하던 아버지는 41년 그를 도와주던 한처녀와 사랑을 나누다 그를 낳았다. 그는 58년 북쪽에서 미제 간첩이라는 혐의로사형당했다. 할머니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가 세살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이에게 이름은 있었다. 그러나 그 이름으로 불릴 수 없었다. 그런 아이에게호적이 있을 리도 없었다. 72년에야 가호적이 만들어졌다. 용주사 수원포교당주소를 본적으로 하고, 아버지는 성명 미상의 남궁씨, 어머니 역시 성명미상의정씨로 올려졌다. 자신의 이름은 혁이라 했다. 험악했던 시절 어딜 가도주민등록증, 예비군 수첩 등을 들고 다녀야 할 때였다. 본래의 이름을 되찾은 건2000년, 그가 환갑이 되던 해였다. 되찾은 이름은 아버지 박헌영, 어머니 정순년그리고 그 자신 박병삼이었다. 그동안 그는 뱅삼, 현준, 명초 일우 등으로 불렸다.

수계 때 받은 성진, 원경을 합치면 이름이 14개나 된다고 한다.

이름이 없었으니 거처가 따로 있을까. 어미를 빼앗긴 뒤 그는 청주 생가를 떠나,남로당 거물 이주하의 처 이순금의 과천 집으로 옮겨졌다. 해방되면서 큰아버지집에 맡겨졌다. 김삼룡, 이주하가 뻔질나게 드나들던 큰집은 1950년 초 이들이검거되면서 쑥대밭이 됐다. 그는 다시 미아가 됐고, 이때부터 남로당의 연락책한산스님의 손에 이끌려 절과 산을 전전했다.

박헌영의 후원자였던 ‘서오릉 할머니’가 관리하던 명월관 대원각을 오가다가김소산을 만나 누나 삼기도 했다. 지리산 화엄사에 맡겨졌다가 피아골 연곡사를거쳐 산사람(빨치산)과 합류해서 한동안 살았다. 거기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만났다. 전쟁 중 인민군 피복창이 있던 강원도 동해로 보내졌다가, 소백산 구인사,무주의 송시열 사당, 전남 담양군 가막골 남부군 노령지구 사령부에 머물렀다.

이들과 함께 지리산으로 올라가 2년 동안 ‘강아지처럼’ 어른 빨치산을쫓아다니며 살았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금릉 청암사에서 당대의 강백인 강고봉 스님에게 글을배우고, 사교까지 뗐다. 58년 한산스님으로부터 아버지의 행적과 죽음을 처음으로전해듣고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전국을 유리걸식하며 떠돌았다. 다시 절집으로돌아간 것은 60년, 인천 용화사였다. 그가 할 일은 달리 없어보였다. 그때 그를잡아준 분은 당대의 선승 전강 스님과 그의 맏상좌 송담스님이었다. 성진이라는법명도 받았다. 남해의 부소암 등지에서 정진하다가 정혜사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자살사건 이후 한산스님의 손에 이끌려 울릉도 등 전국을 떠돌다가 제주도에정착해, 6년 동안 마음공부를 하며 동시에 행공으로 무술을 익혔다. 69년 뭍으로돌아왔지만 그의 마음 속 불길은 여전했다. 잠시 머물던 절에서 현판을부숴버리고, 주지와 다투다 감옥에 수감됐다.

수원 용주사 수원포교당에 머물다가 73년 여주 흥왕사 주지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비로소 한곳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흥왕사에서부터였다. 거기서 그는오로지 참선 수행하고, 농사짓고, 수배자들 거둬들이며 살았다. 10여년 뒤 신륵사주지로 자리를 옮겼고, 지금은 평택 만기사에 머물고 있다.

이름도 거처도 없이 떠돈 세월가슴속 불길 다스린 주문 “만물이 꿈이러니속지 말아라” 흥왕사 이후 정착은 했지만, 조용한 날들은 아니었다. 그의 출생 내력은 언제나그를 흔들어대는 폭풍이었다. 공안기관은 물론 도반들까지도 그를 흔들었다. 83년그가 용주사 주지 자리를 놓고 소란이 있었고, 94년 개혁불사 때에도 그는양쪽에서 흔들림을 당했다. 그를 오해하거나 경원했던 일부 개혁회의 스님들은아예 그의 승적을 박탈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모진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입 닫고, 귀 막고, 눈 가리고 살아야 했다.

말이야 어차피 바람처럼 왔다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 애써 변명도 하지 않고,설명도 하려 하지 않았다.(만기사 명부전 오른쪽 벽면에는 그가 특별히 주문한벽화가 하나 있다. 눈을 감은 원숭이, 귀를 막은 원숭이, 입을 붙들어 맨 원숭이3마리가 첩첩산중, 기암절벽 위에서 도를 닦는 내용이다.) 그러나 불쑥 불쑥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불덩이를 그는 어쩔 수없었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보다가도 불덩이는 치솟았다. 너는 왜 사는가, 왜살려고 발버둥치는가, 너는 누구인가. 그러면 그는 고함을 지르며 산을 뛰어다니고, 파김치가 되도록 목검을 휘둘렀다.

둠벙에 뛰어들며,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베는 미야모토의 필살기를 연습하기도했다. 그 얼굴을 옭아매고 있는 운명이 저주스러웠다. 이것으로도 불길이 잡히지않으면, 바랑이 하나 들고 천지사방을 헤맸다. 8개월간 전국을 샅샅이돌아다니기도 했다.

정착하기 시작했던 흥왕사 시절, 불길이 솟구칠 때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말이 하나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호흡을 길게 두세번 하면 자연스럽게나왔다. “성진아, 성진아, 속지 말아라. 성진아, 속지 말아라.” 간절히 타이르는듯도 하고, 단호하게 경책하는 듯도 하다. 이제는 그에게 밀려오는 경계를다스리는 주문이 되었다.

처소에는 스승인 송담스님이 써준 금강경 사구게도 있다. 그의 주문과 짝을이루는 내용이다. 모든 만물은(一切有爲法)/꿈같고 허깨비같고그림자같고(如夢幻泡影)/이슬같고 또한 번개 같나니(如露亦如電)/…. 성진아,성진아, 속지 말아라. 평택/글 곽병찬, 사진 강창광 기자<ahref=mailto:chankb@hani.co.kr>chankb@hani.co.krⓒ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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