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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드는 새벽, 함께 한 영화음악 그리고 정은임

입력 2004.08.05. 06:17 수정 2004.08.05.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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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문동섭 기자]중고등학교시절을 가만히 떠올려 보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추억이 있습니다. 바로 라디오에 관한 추억입니다.

지금이야 컴퓨터, 인터넷 그리고 첨단을 달리는 핸드폰 등 가지고 놀 만한 것들이 많지만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청소년들이 집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낸 제게 라디오는 생활의 여유와 즐거움을 주는 소중한 친구였습니다.

독서실에서 공부는 하지 않고 대신 라디오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나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고, 특히 공개방송을 하는 날에는 아예 책을 덮고 집중해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수만, 이택림, 이경규, 이성미씨 등이 초대손님으로 나오는 날은 낄낄거리며 배꼽을 잡고 웃는 날이 많았습니다. 또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좋은 노래가 나오면 녹음했다가 반복해서 들었던 일도 빠뜨릴 수 없는 라디오에 얽힌 추억입니다.

그런 추억 중에 가장 값진 것은 이른 새벽 1시 졸린 눈을 비벼가며 들었던 MBC FM <영화음악>에 대한 추억입니다. 어릴 적부터 유달리 영화를 좋아했던 저는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 프로그램을 들었습니다.

조일수 아나운서에서 홍은철 아나운서가 DJ를 끝마칠 때까지 십여 년을 들었으니 저의 학창시절을 <영화음악>과 함께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일수-정은임-배유정-홍은철로 이어지는 <영화음악> DJ 가운데 제가 가장 좋아하고 열광했던 DJ는 바로 정은임 아나운서였습니다. 조일수 아나운서의 차분하면서도 관록 있는 진행에 길들여져 있던 터라, 앳된 목소리를 가진 정은임 아나운서의 방송이 처음에는 상당히 생경하게 들렸습니다. 특히 방송에서 가끔씩 사회문제를 언급할 때면 "왜 저러나?"하고 의아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경함과 의아함은 점점 신선함과 매력으로 바뀌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깊은 밤의 정적을 깨지 않는 그녀의 밝고 진취적인 진행에 빠져들었고, 나중에는 ‘지금까지 정은임이었습니다"라는 클로징 멘트를 듣지 않고서는 잠을 이룰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영화음악>에 대한 저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영화음악"과 청취자에 대한 정은임 아나운서의 사랑도 점점 깊어지는 듯 했습니다. 그런 교감이 저를 "영화음악"의 열혈 청취자, 정은임 아나운서의 팬으로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1995년 정은임 아나운서가 <영화음악> DJ를 그만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절친한 친구를 군대에 떠나보내는 것처럼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런 마음에 방송국에 협박 전화(?)를 걸어 정은임 아나운서를 복귀시키라고 으름장을 놓은 적도 있습니다. 후임 DJ 배유정씨가 괜히 밉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영화음악>과 정은임 아나운서는 고등학교 시절과 20살 시절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지난달 22일 교통사고를 입어 생과 사를 오가다 지난 4일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에게 그녀의 죽음은 한 방송인의 안타까운 죽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영화와 삶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같은 시간대에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추억을 만든 소중한 친구를 잃어버린 것과 같은 심정이겠지요.가끔 심야시간대 교양프로를 진행하는 정은임 아나운서를 볼 때면 힘든 시절을 함께 한 고마운 이를 다시 만난 듯 반가운 마음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반가운 해후를 할 수 없음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영화 <트루 로맨스>의 주제곡 "Amid The Chaos Of The Day"이 시그널 음악으로 흐르면서 찾아오던 정은임 아나운서를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과 추억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함께 할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문동섭 기자- ⓒ 2004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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