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자치주 공짜로 주어진 것 아니다

2004. 10. 18.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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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태경 기자] ▲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 주장(州長)이었던 주덕해의 기념비. 연변대학 뒤쪽 공원에 있다. ⓒ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을 중국 정부의 시혜로 생각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우리 민족의 피와 땀으로 얻어낸 것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1952년 9월3일 "자치구"로 출범했다. 그러나 1955년 4월 자치주로 격하됐다. 초대 주장(행정책임자)인 주덕해는 애초 길림성의 장백현과 흑룡강성 남부의 닝안현 까지 포함하는 "성급" 자치구를 생각했다. 현재 연변조선족 자치주 면적 4만3559㎢의 2배 정도 되는 넓이였다.

그러나 주덕해는 57년 민족정풍운동 때 자치구를 생각했다며 "지방 민족주의자"로 비판받았다. 결국 그는 문화대혁명 때 "매국노", "북조선 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했다.

한 재중동포 학자는 "항일무장투쟁이 한창일 때 만주지역 공산당 간부의 90%가 조선족이었다"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조선족은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많은 공을 세웠다"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에 당당하게 지분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는 말이다.

일제 패망 뒤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을 때 만주에서 인민해방군으로 참전한 조선족은 6만2000명이다. 당시 조선족 전체 인구의 5%나 된다. 중국정부가 1921년부터 1982년까지 활동한 사람가운데 열사로 인정한 사람이 길림성에서만 3만6000명이다. 이 가운데 1만4000명이 재중동포다. 연변의 경우 전체 열사의 93.8%가 우리민족이었다.

연변지역은 1850년대까지 200여년간 청나라의 봉금정책으로 거의 버려져있던 땅이다. 그러나 1860년대부터 조선 사람들이 이 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밭농사만 짓던 한족과 달리 조선족은 이 지역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벼농사의 한계선인 북위 49도선을 뛰어넘어 흑룡강성까지 이를 전파시킨 것도 한민족이었다./김태경 기자- ⓒ 2004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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