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나는 청계천.. 사과나무 심고 다리 두 곳 개통

2004. 11. 17. 11:3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이번에 발굴된 청계천 다리들의 사진은 이름과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청계천의다리들의 실제 모습과 양식은 물론 일제 시기를 거치면서 변형된 모습도 함께보여주고 있다.

길모퉁이앞 과일가게 ‘모전’널다리 형식 건립시기 애매◇ 모전교=중구 무교동 네거리에 있던 다리로 길모퉁이에 과일가게(전)가있었다고 해서 ‘모전’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모전다리, 모교라고도 했다. 태종12년인 1412년 지어진 신화방동 입구교의 이름이 모전교로 바뀌었다는 견해도있으나, 신화방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 최초 건립 시기는 불분명하다. 모전교라는이름은 영조 때인 1760년 나온 <준천사실> 이후 일관되게 나온다.

이번 사진에서 나타난 모전교를 보면 형식은 널다리(형교)이며, 난간 쪽으로다리너비가 확장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장통교나 중학교에서 볼 수 있는 이런형식은 조선 후기의 양식인지, 일제시대의 양식인지 확실하지 않다. 문화재전문가인 손영식 선생은 “멍엣돌 위에 돌을 얹은 뒤 난간을 확장한 것으로보인다”며 “돌다듬 수법이나 난간기둥의 모습으로 볼 때 일제시대에 확장된 것이아닌가 추정된다”고 밝혔다.

모전교는 또 다리기둥(교각)이 길이 방향으로 3줄인데, 오른쪽 두 기둥은 옛양식을 보여주는 돌 구조물이나, 왼쪽 다리기둥은 교각 사이가 넓고 콘크리트재질로 보여 원래 3줄이었는 지는 확실치 않다. 스기야마의 글에는 “하천이한쪽으로 넓어져 다리에도 덧붙여진 콘크리트 부분이 있고, 오래된 쪽은 그대로인것 같다”고 돼 있다. 서울시의 발굴 조사에서 양쪽 호안의 석축이 발굴됐다.

1937년까지 돌다리로 남아기둥 길이 13줄・너비 5줄◇ 하랑교=현재의 청계3가 센추럴 호텔 앞쪽에 있었던 다리로, 주변에하랑위(임금의 사위)의 집이 있었다고 해서 하랑교・하교로 불렸으며, 주변에화류장롱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고 해서 화류교・화교라고도 했다. 서울시에서 나온<서울의 하천> 등 대부분 자료에서는 일제 때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된 것으로 보고있으나, 적어도 1937년까지는 돌다리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진에 나타난 하랑교의 모습은 역시 널다리 형식이며, 장통교나 모전교와마찬가지로 멍엣돌 위에 돌을 추가해 난간을 확장한 형식을 띠고 있다. 하랑교의다리기둥은 사진으로 보면 돌로 만들어진 부분이 최소 9줄이며, 스기야마의 글에는“다리 양끝이 콘크리트로 보강됐다”고 돼 있다. 서울시의 발굴 조사에서기초석과 돌다리 이전의 나무다리 흔적이 확인됐으며, 다리기둥은 길이 13줄, 너비5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시각장애인 많아 ‘소경다리’하천늘어 콘크리트 더해◇ 효경교=세운상가 동쪽 아세아 전자상가 앞쪽에 있었던 다리로 원래이름은 주변에 시각장애인들이 많이 살아서 소경다리・맹교였으며, 이것이효경교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줄여서 효교라고 하고 영풍교라고도 불렀다.

광통교와 함께 다리 밑에 거지들의 움집이 많아 매년 음력 12월에는 왕이 관리를보내 살피고 쌀과 포를 줘 얼어죽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서쪽 다리기둥의 한 곳에‘정사금영개조’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으며, 영조의 준천 뒤 한 정사년에금위영에서 이를 고친 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스기야마의 글에는 “늘어난 하천너비에 맞추기 위해 양끝에 콘크리트를 더했다”고 씌어있다.

사진에 나타난 모습은 전형적인 널다리의 모습이며, 다리 양쪽 가에 낮은 난간이설치돼 있다. 다리기둥은 길이 방향으로 10줄이 확인되나 서울시의 발굴조사에서는길이 13줄, 너비 최소 3줄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하랑교와 마찬가지로 발굴조사에서 기초석이 확인됐다.

??◇ 마전교=청계5가 네거리 동쪽 방산시장 앞에 있었던 다리로 태종 때는창선방교, 성종 때는 태평교라고 불렀으나, 말・소 시장이 옮겨오면서 영조 때부터마전교라는 이름을 얻었다. 순조 이후로는 태평교와 마전교가 섞여 사용됐으며,말・소 시장이 낮에 열리므로 오교라고도 불렀다.

세종 때에는 수표교 주변에 있던 말・소 시장이 도성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한양중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진이 다리의 일부분만 보여주고 있으나, 역시 널다리 형식이며 멍엣돌의 끝이둥글게 처리돼 있고 난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계천 발굴조사에서는 몇 개의석재만이 발견됐고, 기초 구조는 확인되지 않았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