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의 아들"" 난치병 치료 영웅되다

2004. 12. 6.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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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인물’ 선정과정에서 ‘욘사마 신드롬’의 주인공 영화배우 겸 TV탤런트 배용준과 세계 최초로 복제배아 줄기세포를 배양한 서울대 황우석 교수가 후보로 올라 막판 경합을 펼쳤다.

‘욘사마’라는 애칭으로 일본 열도를 강타하며 ‘한류열풍’의 중심에 섰던 배용준은 대중적인 인기를 업고 ‘한류 전도사’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으며, 한국이 아시아의 ‘문화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세계일보는 황 교수가 올해 복제배아 줄기세포를 배양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당뇨병 등 난치병 정복의 발판을 마련하고, 특히 침체된 이공계에 한국 과학의 자부심을 불어넣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 ‘올해의 인물’로 최종 선정했다.

이어 내일부터는 올해 각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한 인물을 선정해 ‘인물 2004’로 소개한다.

#농민의 아들, 소에 빠지다 지난 2월 세계 최초로 복제 배아 줄기세포 배양의 성공을 알리며 세계를 놀라게 한 서울대 황우석 교수. 난치병 치료의 가능성을 열며 ‘바이오혁명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다. 1953년 1월29일(음력 1952년 12월15일) 충남 부여군 은산면에서 농민 황규석(1914년생)씨와 조용연(1919년생)씨의 3남3녀 중에 다섯째로 태어났다. 재산이라곤 초가집과 1000여평의 논밭, 소 3마리가 전부. 1958년, 아버지 황씨가 농사일을 하다가 뇌출혈로 숨지면서 살림은 더욱 어려워졌다. 다행히 그에겐 어머니가 있었다. 조씨는 남의 소를 키워주고 송아지 한마리를 얻는 ‘한우소작’으로 6남매를 키워냈다.

황 교수도 어머니를 열심히 도왔다. 여름엔 물가에서 다슬기를 잡았고, 겨울이면 산에 올라가 부러진 나무를 땔감으로 해오곤 했다. 특히 소에게 풀먹이는 일을 도맡았다. 들꽃 ‘자운영’을 보며 소와 지내는 것은 ‘일’이 아니라 ‘행복’이었다.

“소가 풀먹는 모습은 참 이쁘다. 물 흐르는 냇가가 있는 뚝방 위에서 혀로 삭삭 단계적으로 뜯어먹고, 꼬리를 툭 쳐서 파리를 쫓고….” #아, 어머니의 슬픈 다리 1966년, 대전서중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친척의 권유로 부여에서 대전까지 ‘유학’간 셈. 친척 집에 지내며 중학교를 다녔다.

중 2학년이던 67년, 그는 ‘소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토요일 오후 동구밖까지 마중나온 어머니의 다리를 본 뒤다. 거머리에 물려 시뻘겋고, 풀잎에 베여 상처투성이였던 다리. ‘이렇게 힘들게 소를 키우지 않도록 하리라, 소 과학자가 되리라.’ 69년 대전고에 입학한 뒤, 소 과학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특히 친구들끼리 ‘등 안 대기 운동’도 펼쳤다. 잠을 자더라도 의자에서 자고, 바닥에 절대 등을 대지 말고 공부하자는 뜻이었다. 가난했던 황 교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2, 3학년 때엔 도서관의 책을 정리하고 청소도 하는 등 ‘도서관 보조’로 일하기도 했다.

담임 교사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성적이 최상위권인 황 교수를 불러 의대 진학을 권유했지만, 수의학과를 선택했다. 1지망, 2지망, 3지망 모두 수의학과였다.

#유신에 맞서 데모… 학보 편집장도 암울한 10월유신에 맞서 가슴으로 민주주의를 느꼈던 72학번. 황 교수도 시대에 울분을 느낀 72학번 대학생이었다. 그도 시대상황에 맞서 데모에 참여하곤 했다.

“그 당시 데모를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많이 했다. 다만 리드하거나, 앞에 나가 머리가 깨질 정도로는 하지 못했다. 그때 대부분은 (시대) 상황에 울분을 느끼는 동질감이 있었다.” 또 대학 4학년 시절 농대 학도호국단에서 발행하는 농대학보 ‘상록’의 편집장을 역임했던 것이, 취재팀에 의해 처음 확인됐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대학생의 자세를 강조했다.

“우리는 이 모자라는 것을 지성의 상아탑인 대학에서 갈고 닦아, 젊음의 패기와 합치시키는 날 비로소 완전한 지식인의 첫발을 디딜 수 있다고 생각한다.”(‘편집위원코너:지식인으로서의 대학생의 자세’) ‘소 공부’는 입학 이후 본격화했다. 입학 첫해 건강악화로 1년을 휴학한 것을 제외하곤 수업이 없는 날이면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소 직장검사를 반복했다.

#미래 키워준 농민과의 우정 석사와 박사 학위를 모두 서울대에서 받았다. 그야말로 ‘국내파’인 셈. 박사학위 논문은 ‘쥐의 자궁 및 간에서의 세포질 및 핵내 에스트라디올 수용체와 프로게스테론 수용체에 대한 에스트라디올—17베타 및 프로게스테론이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로, 호르몬과 질병 발생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하지만 ‘학맥’에 막혀 곧바로 교수에 임용되진 못했다. 그래서 시간강사를 전전했고, 현재 경기도 광주의 ‘실험농장’도 개간했다. 이때 쌓은 농민들과 진한 우정은 그의 미래가 됐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가축 상태를 점검하곤 했다. 질병 대책도 가르쳤다. 경기도 광주는 물론 여주, 화성까지 농민이 있으면 달려갔다.

“농민과의 우정을 형성한 소중한 시기였다. 나중에 이들은 실험에 필요한 ‘실험소’를 자발적으로 제공해줘 이후 연구활동에 큰 도움이 됐다.” 1985년 7월부터 시작된 일본 홋카이도대 객원연구원 생활은 새로운 안목을 심어줬다. 기본적으로 복제라는 개념을 세우게 된 것이다. 특히 가나가와 히로시(金川弘司)의 영향이 컸다.

가나가와는 1967년부터 10년간 캐나다와 미국 등에서 공부한 뒤 귀국, ‘홋카이도 소수정란이식연구회’ 등을 세우는 등 소 수정란이식의 전도사. 그래서 황 교수도 “그를 통해 복제라는 개념을 세우게 됐다”고 말했다.

#절망의 끝에서 본 부처 1986년 5월 교수에 임용됐지만, 이듬해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병마였다. 8시간이 넘는 대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죽음은 가까웠고 삶은 너무 멀리 있었다.

“여덟시간 이상 소요되는 대수술을 10일 간격으로 2회째 받고 나서 나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을 무던히도 넘나들었다. 온몸은 앞뒤로 내가 보기에도 흉측스러운 수술 자국으로 도배됐으며, 척추에는 내 뼈가 아닌 이물을 삽입하고 있는 상태였다.”(‘단전호흡과 지압으로 병마 쫓고 새 삶 즐겨’)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던 그해 가을, 친구와 함께 강화도 전등사를 갔다. 당시 절대자 또는 종교에 대한 신뢰가 없던 상태. 하지만 ‘소 과학자’에 대한 염원은 그를 부처에게 이끌었다.

“부처님을 본 순간, ‘절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래서 절을 했다. 그런데, 기분이 정말 좋아졌다. ‘다시 실험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 그래서 한달에 한번씩 오기로 약속했다.” 건강을 회복한 황 교수는 이후 평생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연구에만 매진했다. 연구는 체세포 복제(1단계)→유전자 조작을 통한 형질전환(2단계)→인간 줄기세포(3단계)로 발전했고, 그것은 바로 한국 바이오혁명사가 됐다.

김용출기자/kimgija@segye.com선정 이유 ‘올해의 인물’ 선정과정에서 ‘욘사마 신드롬’의 주인공 영화배우 겸 TV탤런트 배용준과 세계 최초로 복제배아 줄기세포를 배양한 서울대 황우석 교수가 후보로 올라 막판 경합을 펼쳤다.

‘욘사마’라는 애칭으로 일본 열도를 강타하며 ‘한류열풍’의 중심에 섰던 배용준은 대중적인 인기를 업고 ‘한류 전도사’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으며, 한국이 아시아의 ‘문화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세계일보는 황 교수가 올해 복제배아 줄기세포를 배양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당뇨병 등 난치병 정복의 발판을 마련하고, 특히 침체된 이공계에 한국 과학의 자부심을 불어넣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 ‘올해의 인물’로 최종 선정했다.

이어 내일부터는 올해 각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한 인물을 선정해 ‘인물 2004’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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