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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혼,고구려는 지금] 백제 견제용 전초기지 '보루'..시설과 병력의 규모는?

입력 2005. 02. 15. 06:37 수정 2005. 02. 15.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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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의동 유적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고구려 요새지만 1970년대 아파트 개발 열풍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높은 구릉에 위치한 구의동 보루는 한강 일대를 넓게 조망할 수 있어 고구려의 한강유역 군사작전에서 최전방 초소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보루는 1977년 화양지구 택지개발 과정에서 요새를 떠받치던 구릉이 완전히 깎여나간채 고층 아파트로 변했다.

백제가 축조한 서울 몽촌토성은 고구려가 한강 이남을 지배한 475년 이후 고구려 지배층이 거주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몽촌토성은 성 전체가 공원으로 조성되는 등 보존 상태는 좋지만 ‘반쪽짜리’ 역사만 남아있었다.

몽촌토성 역사관에서는 이 토성을 고구려가 점유했던 역사나 발굴된 고구려 유적과 유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설명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고구려 요새가 고층 아파트 단지로=해발 53m 구릉 정상부에 위치했던 구의동 유적은 화양지구 토지 구획정리 사업 과정에서 발굴이 시작됐으나 발굴이 끝나자 파괴됐다.

당시 고고학계에서는 유적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개발 바람에 밀렸기 때문이다.

보루가 있던 자리에는 1983년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보루의 흔적은 발굴조사 보고서에만 남아있을 뿐이다.

당시 서울대박물관 보고서는 지름 15m,둘레 46m 정도의 석축을 쌓고 그 내부에 7.6m 길이 구덩이를 파고 건축물을 지은 것으로 화살촉 칼 창과 같은 무기류 3000여점이 출토됐다고 밝히고 있다.

구의동 보루는 발굴 당시 군사 유물이 많이 나와 군사 요새일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백제고분으로 보고됐다.

1988〜1989년 몽촌토성 발굴 과정에서 구의동 보루에서와 유사한 고구려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자 뒤늦게 고구려 요새라는 해석이 인정을 받게 됐다.

하지만 구의동 유적은 이미 사라진 뒤였고 유물들은 서울대 박물관 등지로 옮겨진 상태였다.

취재팀은 구의동 보루의 군사적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보루가 있던 한양아파트(현재는 자양동)를 찾았다.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자 멀리 의정부시 외곽에서 잠실에 이르는 지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강 북쪽 요새가 밀집한 아차산과 용마산,한강 남쪽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등 백제 성들도 내려다보였다.

고려대 최종택 교수는 “성벽 남쪽 2곳에 네모난 돌출부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망볼 수 있었다”며 “구의동 보루는 고구려 남하시 한강 이남 관측 거점 역할을 했고 나제연합군 북진 시에는 1차 방어 기지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요새 안 온돌 아궁이에는 군사들이 밥을 짓기 위해 이동 전 반드시 먼저 철거하는 철솥과 철항아리가 그대로 걸려 있어 구의동 보루 고구려군은 기습 공격으로 전멸했던 것으로 학계는 해석하고 있다.

최 교수는 “유적은 택지 개발로 사라졌지만 아파트 입구에 푯말 하나라도 세워 이곳이 고구려 최전방 군사요새였음을 알릴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며 아파트 단지를 나섰다.

◇고구려 역사가 빠진 몽촌역사관=백제 초기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은 남한산과 연결된 저산성 구릉이 형성되는 곳에 위치한 산성에 가까운 형태였다.

둘레 2285m 면적 6만7000평 규모인 몽촌토성은 88 서울올림픽 체육시설 건립지역으로 확정되면서 발굴이 시작됐다.

서울대박물관이 1983〜1988년까지 6차례 발굴조사를 한 결과 몽촌토성은 성곽과 성 내부 시설 모두 백제가 축조하고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고구려 온돌터와 15개 종,329개체분의 고구려 토기도 확인돼 고구려가 475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한강 유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남긴 흔적으로 학계는 보고있다.

성 서남쪽 고지대에서 발견된 온돌터에서는 고구려식 온돌고래와 굴뚝시설이 확인됐다.

고구려 토기 가운데 나팔입항아리는 중국 지안(集安) 지역에서도 출토된 5세기 중엽의 유물이며 원형삼족기는 평양 고분에서도 확인됐다.

이 그릇들은 일상생활용품이 아니라 부장용이나 의례용기로 주로 쓰였기 때문에 몽촌토성에 거주한 고구려인들의 지위를 가늠해볼 수 있다.

일상 용기가 주로 출토된 구의동이나 아차산보다 지위가 높고,군사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행정적 성격까지 갖는 관리가 파견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최 교수는 “백제가 한강유역에 자리잡고 발전한 시기는 500여년이지만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지배한 기간이 80여년에 불과했다”며 “그러나 고구려 출토 유물의 수량이 많아 고구려 지배 당시 상당한 규모가 몽촌토성에 거주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82년 사적으로 지정된 몽촌토성은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시교육청 학습지정기관으로 연간 수천명의 학생들이 방문하는 성 내 몽촌역사관은 고구려 역사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한강 유역에 위치한 몽촌토성은 삼국간 치열한 경쟁의 와중에 격동의 시기를 보냈지만 백제가 점유했던 성으로만 밋밋하게 기록돼 있다.

최 교수는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고구려 유물과 구의동 토기의 유사성이 알려진 1994년 이후 학계에서는 고구려 남하정책에서 몽촌토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지만 몽촌토성 역사관은 아직도 반쪽짜리 역사만 보여주고 있다”면서 “역사관에 역사를 전공한 전문 학예사가 1명도 없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역사관측은 “공식 요청을 해달라”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강주화기자 rula@kmib.co.kr사진=이병주기자(6회는 유적 현장 자체가 없습니다.

구의동은 아파트로 변했고 몽촌토성은 공원화돼 역사관만 남았습니다.

가능한 사진은 발굴당시 구의동유적(스캔,화상부 처리 예정)과 현재 아파트단지 모습,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 둥근입항아리(스캔)와 삼족기(스캔)입니다)동행취재=고려대 최종택 교수도움말=토지박물관 심광주 실장,충북대 차용걸 교수,서울대박물관 양시은 연구원,경기도박물관 백종오 학예연구사,고구려연구재단 임기환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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