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수교수의 이야기교회사(44)] 성결교회의 부흥회 모습

2005. 3. 16.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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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84년이다.

하지만 복음 전파의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선교사들이 정식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은 것은 1898년이 되어서였다.

복음 전파의 문은 서서히 열렸다.

한국인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금지되어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움트기 시작한 호기심은 법으로 막을 수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노도사라고 알려진 노춘경(盧春京)이었다.

그는 우연히 한문으로 된 기독교 배척문서를 읽고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접근하여 기독교를 알고자 하였으나 선교사들은 주저하였다.

노춘경은 포기하지 않고 선교사 앨런의 집에 가서 그의 책상위에 놓여 있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몰래 가져가 열심히 읽었다.

노춘경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는 구할 수 있는 대로 많은 기독교 서적을 읽었고 선교사들의 주일예배에도 참석하였다.

그는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언더우드에게 세례문답을 받았다.

언더우드는 마지막으로 이 나라의 법이 아직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고 있으며 한번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마음을 바꾸어 돌아서면 안된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노춘경은 자신의 결심은 분명하며 최악의 경우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고 대답했다.

선교사들은 이 세례문제에 민감했다.

아펜젤러는 자신의 느낌을 1886년 7월24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로서는 그 의식이 대단히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게 될 매우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신 분께서 그를 지키시리라고 확신한다.

” 이런 논의와 기도 과정을 거쳐서 1886년 7월18일 주일에 헤론 선교사의 집에서 노춘경은 세례를 받았다.

한국땅에서 한국인에게 준 최초의 세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세례는 목숨을 건 세례였다.

<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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