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인격론이 다중인격자 만들어냈다"

2005. 10. 7.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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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과학속 사상, 사상속 과학/ (21) 이언 해킹의 과학철학 프로그램다른 유명한 학자들처럼, 이언 해킹의 학생들은 선생에 대해 몇 가지 '신화'를 얘기한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 스탠포드대학의 젊은 조교수로 재직하던 해킹은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에 흠뻑 빠진 뒤에 푸코에 대한 두툼한 책을 한권 저술했다고 한다. 그런데 원고를 마무리한 해킹은 원고 더미를 휴지통에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이를 의아해한 학생들이 그 이유를 묻자 해킹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푸코를 연구하지 말고 행하라"(Don't study Foucault; Do Foucault).

이러한 신화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해킹이 그 당시에 '미셀 푸코의 덜 성숙한 과학(immature science)'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던 것은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이 논문은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철학자인 토머스 쿤과 미셀 푸코를 결합해보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푸코가 누구인가! <지식의 고고학> <감시와 처벌>을 써서 1960~70년대 급진적 젊은이들을 매료시킨 프랑스 철학자가 아닌가. <과학혁명의 구조>를 쓴 쿤과 푸코의 결합이라니. 대체 이 둘의 만남을 허용하는 작은 공통점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해킹이 쿤과 푸코를 만나게 한 방식은 다음과 같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다룬 예는 대부분 물리학, 천문학, 화학과 같은 과학들이다. 즉 패러다임이 분명하게 확립되고 이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혁명적인 변화를 하는 '성숙한' 과학 분야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은 주어진 패러다임 아래서 자연현상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노력하며, 이 과정에서 과학이론은 달라질 수 있지만 과학의 대상인 자연은 계속 같은 방식으로 실재한다. 곧 성숙한 과학은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그런데 푸코가 관심을 둔 의학이나 심리학과 같은 '인간과학'(human sciences) 분야는 '덜 성숙한' 분야들이다. 덜 성숙한 인간과학 분야에서는 과학이론의 변화가 이에 해당되는 대상을 만들어낸다. 해킹의 관점으로, 바로 이점이 푸코의 저술에서 과학철학이 배울 수 있는 가장 심원한 교훈이었다.

그런데 대상을 만들어낸다니? 해킹은 두 가지 역사적 사례의 연구를 통해서 인간과학이 어떻게 대상을 만들어내는가를 보였다. 그가 연구한 사례는 모두 논쟁적이었는데, 첫번째 예는 '아동학대'였고 두번째 예는 '다중인격'이었다. 해킹은 해당 과학의 발전이 '아동 학대자'와 '학대받은 아이들'을 만들어냈고, '다중인격자'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해킹의 주장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정신과 의사들은 원래 존재했던 다중인격이라는 정신병을 발견한 것이 아닌가? 아동학대자들과 학대받은 아이들도 원래 존재했는데 사회가 이를 문제삼아 세상 밖으로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해킹의 자세한 실증적 연구는 이것이 이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없던 범주를 만들고, 이를 통해 사람을 분류하고, 측정하고, 계량화하고, 그 원인을 연구함으로써, 원래는 없던 인간 유형(kinds of people)을 만드는데, 이렇게 사람의 유형이 만들어지면 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과학이 특정한 유형의 사람을 만들고(make up people), 이렇게 만들어진 사람들이 다시 과학을 정당화하고 바꾸는 것을 해킹은 '고리효과'(looping effect)라고 명명했다.

연구마다 거센 논쟁 불러

해킹이 1995년에 출판한 <영혼 다시쓰기: 다중인격과 기억의 과학>은 정신병을 연구하는 의사들에 의해 다중인격이라는 범주와 다중인격자라는 인간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상세히 분석한 책이다. 논쟁적인 책들이 다 그렇지만 이 책은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다중인격 환자들을 다루고 치료하는 의사들은 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과학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해킹의 주장을 수용하거나 이해하기 힘들었다.

쿤과 푸코를 종합했지만 해킹은 쿤에서 한걸음 더 나갔다.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분명히 쿤이 혁명이라고 명명한 급격한 발전과 정상과학 시기의 완만한 진화가 뚜렷하다. 그리고 혁명의 시기에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추종하는 과학자들 사이에 쿤이 '공약 불가능성'이라고 명명했던 소통의 어려움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쿤의 이론만을 가지고 잘 설명이 안 되는 것은 패러다임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연속적인 요소들이 과학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해킹은 과학의 단절과 연속을 모두 설명하는 개념으로 '추론의 스타일'(style of reasoning)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간단히 말해 과학에는 수학적·실험적·확률적·분류적·통계적 스타일과 같은 다양한 스타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 중 수학적 스타일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등장해서 지금까지 남아 있고, 실험적 스타일과 확률적 스타일은 17세기 과학혁명기에 등장했다. 분류적 스타일은 18세기 이후 생물학 분야에서 주로 사용되며, 통계적 스타일은 19세기에 만들어졌다.

항상 앞서가는 철학자

해킹의 스타일 개념에는 흥미로운 점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스타일은 한번 만들어지면 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학적 스타일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었고, 실험적 스타일은 17세기 이래 과학의 지배적 스타일이 되었다. 이렇게 해킹의 스타일은 쿤의 패러다임과 달리 과학의 지속성과 연속성을 설명한다. 그런데 새로운 과학의 스타일이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시기에는 이 스타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과 소통의 어려움이 야기된다. "X라는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3분의 1이다"는 명제는 확률적 스타일을 수용한 사람에게는 과학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실험이 과학적 사실을 만들어낸다"는 원칙도 실험적 스타일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만 참인 것이다. 17세기 과학혁명기에 등장한 많은 논쟁은 새로운 스타일의 부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었다는 것이 해킹의 해석이다.

우리나라에 해킹의 철학은 오래 전부터 소개되었다. 우리에게 해킹은 '실험실의 철학' 혹은 '실험철학'을 주창한 사람으로 유명한데, 과학철학자들 사이에서 해킹의 '실험 실재론'(experimental realism)은 오랫동안 연구와 논쟁거리였다. 과학철학을 비롯한 과학학(Science Studies)이 과학이론으로부터 실험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 데에는 해킹의 <표상하기와 개입하기>(1983)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지난 20년간 과학철학 분야에서 숱하게 인용된 이 책이 두 달 전에 드디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과학이 무엇인가를 논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할 20세기의 고전이다.

해킹은 쉼이 없는 철학자다. 그는 <확률의 등장> <우연 길들이기>와 같은 확률론과 통계학에 대한 책도 저술했다. 이 책들은 과학사를 전공한 사람이 보아도 놀랄 정도의 독창적인 역사연구에 바탕한 철학적 저술이다. 해킹의 책을 읽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실험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지만 해킹은 그 때 다중인격을 연구하고 있었다. 다중인격에 대한 책의 영향으로 다른 철학자들이 정신병을 연구하고 있지만, 해킹은 지금 추론의 스타일에 대한 책을 쓰는 중이다.

그는 과학의 군사화가 한참일 때 이를 비판하는 철학 논문을 썼고, 몇해 전에는 극단적 사회구성주의를 비판하는 <대체 무엇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말인가?>라는 저술을 출판해 사회구성주의자들의 격렬한 비난을 한몸에 받기도 했다.

<표상하기와 개입하기>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해킹은 게놈계획이나 정보기술과 같은 현대과학의 문제에 대해 철학자들이 발언하고 개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과학에 대한 이론적 분석만이 아니라 항상 '실천'을 염두에 두는 해킹의 연구는 "푸코를 행하는" 그의 젊은 시절의 철학이 7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직 싱싱하게 건재함을 잘 보여준다.<끝> << 온라인미디어의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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