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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기 유린 현장..서삼릉 태실

입력 2006. 02. 22. 17:54 수정 2006. 02. 2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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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연합뉴스) 우영식 기자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사적 제200호) 태실(胎室, 왕족의 태를 항아리에 담아 보관해둔 곳) 집장지는 일제가 우리 문화재를 파괴했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줬다.

22일 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 정동일(40)씨의 안내로 그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됐던 서삼릉 태실에 들어선 순간 민족정기가 유린된 아픈 과거가 생생하게 되살아 났다.

태실군은 집장지 철문을 열고 100여m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300평 남짓한 부지에 위치했다.

집장지 주변은 1m 높이의 울타리를 쳐 경계를 삼았고 내부는 조선시대 왕의 태실비(胎室碑, 태실의 주인과 건립시기가 기록돼 있음) 22위와 왕자, 공주의 태실비 32위가 양쪽으로 구분돼 나란히 늘어서 있다.

태실의 주인공과 건립시기, 원래 위치 등이 적힌 태실비는 글자체가 같아 모두 같은 시기에 조성됐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태실비의 뒷면은 일제 때 기록을 해방 후 지운 자국이 남아있으며 일부는 한국전쟁 때 포탄을 맞아 파손된 채 흉물스럽게 서 있다.

정씨는 "전국 각지 명산에 조성된 태실은 왕실에서 관리를 임명, 업격히 보관해왔다"며 "그런데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태실이 파괴될 염려가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흩어져 보관돼 있던 왕과 왕손의 태실 54기를 파내 이곳에 옮겨와 서삼릉 태실을 조성했다"고 설명했다.

일제는 우리의 전통적 조성방식을 무시한 채 태함(胎函, 화강석 재질의 관으로 태항아리를 보관)을 시멘트관으로 바꾸고 태실 주변을 날일자(日)형으로 담을 둘러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했다.

또 문종.세조.성종 등의 백자 태항아리 10여점과 태조 등의 태실 봉안 기록이 담긴 태지석(胎誌石) 17점을 빼돌리고 조잡한 일제시대의 물건으로 바꾸는 등 전통문화 파괴를 시도했다.

그나마 지난 96년 문화재연구소가 철제 담을 없애는 등 왜색이 짙은 태실을 정비했지만 아직까지 태실의 규모나 내부시설 등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정씨는 "원 상태로 보존된 태실은 현재 3~4곳 정도지만 조선후기까지 130여곳이 있었다"며 "국가차원에서 태실에 대한 역사적 고증을 거쳐 태실을 원래 조성된 곳에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wy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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