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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숙명여대 이경숙 총장 '淑明을 宿命으로' 헌신

입력 2006. 03. 05. 19:20 수정 2006. 03. 0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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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도 힘들지만 수성(守成)은 더 힘들다.' 기업가들이 흔히 하는 얘기지만 'CEO 총장'을 요구하는 요즘 대학사회에도 딱 들어맞는 말이다. 최근 4선 연임으로 화제가 된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63). 행정력과 모금 능력, 조직관리력 등 한마디로 대학 총장도 팔방미인이 되어야 하는 한국사회에서 단연 눈길을 끈다. 한자리에 오래 있게 되면 으레 '험담의 도마'에 오르거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럼에도 '파열음' 없이 4선 연임을 했다면 정말 대단한 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선 연임이라… 도대체 그 비결은 무엇일까.' 2월의 마지막날, 그를 만나러 서울 용산구 청파동 캠퍼스로 가는 길은 잔뜩 흐려 진눈깨비가 흩뿌렸다.

총장실에서 만난 이총장은 연두색 정장 차림이었다. 단아한 모습에 부드러운 미소로 기자를 맞이하는 그는 분명 카리스마 넘치는 여장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수다스러운 여성들처럼 말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애들 이야기가 화제가 될 때면 자식자랑에 열심인 이 땅의 어머니처럼 학교 자랑은 줄줄 늘어놓는다. 그속에 자신의 이야기는 없다. 겉보기엔 한국의 여느 어머니처럼 평범해 보이는 여성총장. '카리스마가 넘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대학조직을 관리했기에 숙명이 성장가도를 달려왔을까.' 궁금증은 늘어만 갈 뿐이었다. 그가 대학총장으로서 걸어온 길을, 시간의 태엽을 되감아 처음부터 걸어가 보기로 했다.

#50년 묵은 과제를 해결한 큰 살림꾼

1994년 3월. 숙명여대 총장직을 맡은 이경숙 교수. 새로운 역할을 맡았다는 기쁨도 잠시, 그가 바라보는 청파동의 하늘은 흐리기만 했다. 1906년 고종황제 때 설립된 최초의 여성사학.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까지 재산관리를 제대로 한 이가 없었다. 학교 부지를 제대로 정리 안해 일부는 국유지로 귀속된 채로 50년간 이어져 온 상태였다. 재경원, 총무처, 국방부, 산림청 등 7개 부처에 귀속된 부지에 대해 임대료를 내야 할 입장에 처한 것이 당시의 숙명여대였다. 재원이라야 등록금이 전부였던 시절, 각 부처에서 날아오는 세금고지서, 쌓여만 가는 연체료…. 학내외 사정은 법적·재정적으로 난마처럼 얽혀 있었다.

"당시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어요. 첫 임기 4년동안은 거의 매일 오전 7시에 나와 밤 10시까지 관련부처 담당공무원 등을 만나야 했습니다. 그린벨트로, 공원용지로 묶여 있는 땅들을 학교부지로 풀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찾아가면 반겨주기나 하나요. 무조건 안된다는데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고심하며 분초를 다투며 뛰어다녔어요."

이총장은 그때 '마음을 비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했다고 한다. 개인적인 자존심과 이미지를 생각했다면 학교부지 문제는 풀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9개월을 쫓아다녀도 풀리지 않아 거의 포기단계에 들어설 때쯤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백명을 수십번 만났는가 싶었을 때 불법건축물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6,000평에 불과하던 학교 부지는 오늘날 1만8천평이 되었다. 길게는 90년, 짧게는 50년 묵은 과제를 이총장은 끈질긴 인내로 풀어낸 것이다.

#꿈을 팔아서 재원을 마련하다

'학교부지 되찾기'란 고개를 하나 넘으니 '재정 보충'이라는 더 가파른 고개가 나타났다. 이총장은 우수한 학생을 양성하려면 제대로 된 교육시설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 임기 때 이미 2006년 창학 100주년을 목표로 장기발전계획을 수립, 미래를 설계할 비전을 제시했다. 또한 학교 발전기금으로 1천억원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경험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모금이란 게 쉬운 일인가. 이총장은 동문들부터 설득해 나갔다. 등록금 한번 더 내기 운동을 펼친 것이다.

98년 총장 연임 때 외환위기를 맞았다. 발전기금 모금도 당연히 어려움에 부딪혔다. 이총장은 세계 최상의 명문여대를 만들겠다며, 여성리더를 양성해야 한다며 더 적극적으로 뛰었다. 기업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했다. 술 한잔 못하고 골프도 못치는 여성총장. 한국 사회에서 차 한잔 마시고 식사대접을 하면서 공감을 얻어내기가 그리 쉬운가. 그는 비전을 제시하고 꿈을 팔았다. 학교 건물을 11개 지으면 명문대학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라며 재원 마련에 매달렸는데 벌써 19개를 세우고 20개째 짓고 있다. 그의 꿈은 지난 10여년간 끊임없이 증축되고 있었다.

이총장은 숙명여대를 세계 최고의 리더십대학으로 만들겠다는 더 큰 비전을 제시하며 향후 100년의 꿈을 키우고 있다. 제시한 비전이 번듯해진 캠퍼스로 가시화되는 데 발목을 잡을 사람은 없었다. 연임하면서 덕본 것도 많았다. 장기적으로 교섭을 해야 하는 프로젝트도 비교적 순탄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정영양자수박물관을 비롯, 세계적 조각가 고(故) 문신의 작품을 한데 모은 문신미술관 건립, 세계적 요리 학교인 프랑스의 '르 꼬르동 블루'와 합작한 '르 꼬르동 블루 숙명 아카데미' 설립 등이 그 예다.

#부드러움, 디지털시대의 리더십

그는 첫번째 총장직을 맡은 이듬해 10년 앞을 내다보는 비전을 제시했다. 최첨단 정보기술(IT) 시스템을 갖춘 디지털캠퍼스, 여성리더 육성을 위한 인프라 구축. 이제야 구체화하고 있는 시대적 화두를 일찌감치 꺼낸 것이다. 그것을 구체화하는 동력은 '독불장군식'이 아니라 부드러움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옷색깔이 연두색이어서 그런가. 이총장의 이미지는 식물성에 가까웠다. 식물성의 미덕은 지속성에 있다. 끊임없이 수직상승을 꿈꾸는 나무들…. 그중에서도 휘어지되 꺾이지 않는 대나무의 유연함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대학 총장, 대학 내에서는 최고의 자리다. 어렸을 때 장래 희망이 대학교수였으니 그는 꿈을 더 크게 이룬 셈이다. 어렸을 때부터 모범생의 길만 걸은 것 같아 슬쩍 물어보니 신앙의 힘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공부를 잘 해 초등학교 때부터 반장은 늘 도맡아 했다. (요즘은 반장을 선거로 뽑지만 예전엔 주로 공부 잘 하는 학생이 맡았다.)

경기여중·고를 거쳐 숙명여대 수석 입학, 수석 졸업. 학생회장을 맡으면서부터 리더십의 자질을 키워 왔던 것 같다.

바깥에서 100점짜리 '유명 인사'도 가정에서는 50점짜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이총장도 이 엄연한 현실은 벗어날 수 없었던 것 같다. 가족의 희생 없이는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이총장에게도 늘 걸리는 부분이 있다. 첫 임기를 시작할 때 아들이 고3이었다. 보통 가정에서는 부모도 수험생처럼 지낸다고 하지만 일에 매달리다보니 입시준비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해줬다. 아들은 대학에 떨어져 재수를 했다. 지금은 제 갈길을 제대로 가고 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 아픈 엄마'가 된다. 그때를 보충하려고 지금도 바쁜 와중에 짬을 내 아들, 딸에게 전화도 하고 문자를 보내기도 한다.

집 바깥에서 보면 빈 뒤주를 물려받아 쌀을 가득 채운, 숙명(淑明)이란 가문을 일으켜 세운 큰 살림꾼. 그러나 집안에서도 당연히 살림을 챙겨야 한다며 가족의 아침식사를 직접 차리는 자상한 어머니. 경중(輕重)이야 따질 수 있으랴만 크고 작은 두 가문의 살림을 이끄는 힘은 인내와 부드러움이다.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했던가. 카리스마 넘치는 여장부가 20세기 이전의 리더십이었다면 이총장의 부드러운 리더십은 디지털시대 감성코드와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이동형 매거진X부장 s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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