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대법원 '과거사 반성' 무더기 판례 변화 예고

입력 2006.03.07. 06:03 수정 2006.03.07.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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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법원 판례의 안정성 취약 위험 우려도 대두

(서울=연합뉴스) 김상희 기자 = 이용훈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취임 당시 "과거 사법권 행사에 문제가 있었다는 판결들을 살펴보겠다"며 공언한 판결문 분석작업이 6개월만에 사실상 끝남에 따라 `과거사'와 관련한 무더기 판례 변화가 예상된다.

또, 대법원이 부끄러운 과거로 단정한 재판에 관여한 법관 가운데 일부는 아직 법원 고위직에 남아 있어 과거사 반성이 가시화될 경우 `인적청산' 목소리도 거세질 것으로 점쳐진다.

특히 최고 법원인 대법원이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판례를 쉽게 변경한다면 법적 안정성이 취약해질 위험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과거사 반성을 둘러싼 논란도 적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 무더기 판례 변화 예상 = 대법원이 별건으로 5천건, 심급에 따라 중복된 판결을 통합하면 3천100여건에 달하는 판결문을 6개월만에 분석한 속도를 감안하면 과거사 반성에 대한 상당한 의욕을 갖고 실무작업에 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법원 법원행정처에서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법관들이 관여했지만 분석 내용이 전원합의체를 주관하는 이용훈 대법원장에게 보고된 점에 비춰 이번 판결문 분석 결과는 결국 대법원 판례 변화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판결문을 분석한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작업을 통해 대법원이 과거 판결 흐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식을 하게됐다.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전원합의체 등을 통해 판례를 확립하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우리 법원은 사법권 독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법관의 독립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아픈 과거가 있다"고 누차 강조한 것도 판례 변화 가능성을 예고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가장 적극적인 변화가 예상되는 분야는 시국ㆍ공안사건과 국가범죄사건이며 대법원은 유신정권 시절 긴급조치법 위반 사건 판결에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최종길 교수 사건 같은 국가범죄사건에서 손해배상 소멸시효 주장을 배척해 적극적인 국가배상을 명하는 대법원 판례가 나올 가능성이 점쳐진다.

인혁당 사건 같은 국가보안법ㆍ긴급조치법 사건의 재심이 청구될 경우 대법원이 `피고인들의 행위를 실정법 위반 행위로 보기 어렵다'고 해석해 과거 판례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판결을 내릴 가능성도 있다.

◇ 대법원 `신중에 또 신중' = 대법원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자칫 정쟁(政爭)으로 이어지거나 `사법부내 인적 청산' 바람을 일으키는 상황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과거사 반성은 더 이상 미룰 수 없고 미뤄서도 안되는 일이지만 그런 반성의 결과가 `더 나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둘러싼 갈등 재연'이라면 득(得)보다 실(失)이 더 많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대법원이 `판결문 분석 결과를 둘러싸고 정쟁이 예상된다면 일절 공개하지 않으며 분석작업은 사법부가 독자적으로 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은 이런 우려를 감안한 조치다.

`과거사' 판결에 현직 고위 법관들이 관여한 사실도 대법원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을 느끼는 부분이다.

대법원의 한 관계자는 "당시 27살짜리 판사가 아무 생각 없이 판결했다는 의심이 드는 판결문도 있다. 해당 판사가 스스로 반성한다면 좋겠지만 그가 당시의 잘못을 지금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대법원은 특정 법관이 공개적으로 상처를 입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검토 결과의 외부 공개는 피하고 판결문 분석을 위한 수사ㆍ재판기록을 검찰이나 국정원에 요청하는 일도 자제하기로 했다.

하지만 법관이 군사정권에 굴복해 헌법에 보장된 양심을 스스로 저버린 행위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법원 안팎에서 커지면 현직에 남아 있는 당사자들은 진퇴 여부를 놓고 심각한 갈등을 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 갑작스런 변화에 따른 부작용 = 과거사 반성을 위한 대법원의 적극적인 행보가 알려지면서 하급심 법원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재판에 영향을 받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대법관들이 전원합의체로 참여해 논의를 거친 뒤에야 가능한 판례변경이 대법원장 한 사람의 적극적인 의지로 가능하다면 이는 오히려 대법원 판례의 안정성을 취약하게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비판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서울지역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대법원이 `과거사 반성' 쪽으로 판례를 변화시킬 것을 예상하고 하급심에서 먼저 판례를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겠지만 대법원에서 뒤집힐 것을 알면서 기존 판례를 따르기도 어렵다"며 고충을 털어놨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과거사 문제는 당시 상황과 수사기록 등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기 때문에 제3자 입장에서 당시 판결에 대해 뭐라 말하는 것은 오히려 섣부른 감이 있다"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lilygardener@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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