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미우리 신문 '전쟁책임 최종보고서2'

2006. 8. 16.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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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강경파가 '주도' 언론·정치권은 '방조'

요미우리(讀賣)신문은 일본의 침략 전쟁에 대한 지도자들의 책임을 묻는 연간 기획시리즈 '검증, 전쟁책임'의 최종보고서 2탄을 15일 발표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를 강행한 것을 계기로 지난해 8월 시작된 이 기획은 A급 전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를 최대 전쟁책임자로 규정했다. 다음은 그 요약이다.

도조 히데키 최대의 책임

중일전쟁에서 영국, 미국과의 전쟁으로 발전시킨 책임을 '개전 책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일전쟁에 돌입하고 수습을 위해 손쓰지 않은 것을 '계속 책임'이라고 본다면 도조는 두 가지 책임을 모두 져야 한다. 1928년 3월 시작된 만주사변이 중일전쟁으로 확대된 시기 주요 보직을 역임한 도조는 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강경론을 앞세우며 실전 지휘에 나서기도 했다.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내각에 육군장관으로 입각한 도조는 미국과 일본의 전력 비교 조사에 처음으로 관여해 장기전은 곤란하다는 결과가 나왔는데도 전쟁을 주장, 결국 미일 전쟁에 돌입했다. 도조 정치의 특징은 헌병을 앞세운 탄압과 국가에 의한 정보독점이었다.

육군장관시절 도조는 '살아서 포로의 굴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전진훈'(戰陣訓ㆍ41년 1월)을 발표, 죽음을 무릅쓴 돌격을 정당화하고, 옥쇄를 부추겼다. "우리 비행기 한 대가 적 함정 한 척을, 우리 특수함정 1기가 적함 1척을 전멸시키는 결사대에 의해 적을 물리칠 수 있다"(44년 6월)며 자살공격을 촉구하기도 했다. 사이판 함락 후 도조는 본토 결전에 의한 전쟁 계속을 제창했고, 천황에게도 직소했다. 도조에게는 국민의 생명에 대한 배려가 최후까지 결여돼 있었다.

파멸적 전쟁을 추진

책임 무거운 정치가와 군 수뇌 전쟁은 국가질서에의 도전과 책임정치인 입헌체제의 붕괴로 인해 발생했다. 여기에 군 관료주의에 의한 국책결정과 국가총동원제의 확립이 주요 요인으로 추가된다.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는 이에 깊이 관여한 정치가였다. 고노에의 정치 사상은 '영국과 미국 본위의 평화주의를 배격한다'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고노에는 만주사변에서 적극적으로 군부를 지지했다.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노구교(盧溝橋)사건에 직면한 고노에는 육군의 요구에 굴복해 파병을 인정했다. 그는 또 군이 추구했던 국가총력전 체제 만들기에 법적 근거를 주었다. 34년 4월 공표된 국가총동원법이 그것이다.

중일전쟁시 고노에와 함께 달린 인물이 히로다 고키(廣田弘毅)이다. 사이토 미노루(齊藤實) 내각 등에서 외무장관을 역임한 그는 미국ㆍ영국과의 협력외교로부터의 전환을 모색했다. 고노에를 이어 총리에 오른 그는 국무대신 현역무관제의 부활 등 친군부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石) 외무장관은 고노에의 '영미 본위의 평화주의를 배격한다'는 국제질서관을 추종하는 외교를 전개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3국동맹이 체결되자 마쓰오카는 모스크바로 달려가 41년 4월 일소 중립조약을 조인했다. 미국ㆍ영국에 대항하려 한 마쓰오카가 손을 잡으려 한 상대는 히틀러와 스탈린이었다. 2개월 후 독일과 소련은 전쟁에 돌입, 마쓰오카의 독자 외교는 붕괴했다.

전쟁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전쟁 중 일본은 세계의 조류를 잘못 읽었고, 국제정세에 대한 치우친 정보와 잘못된 분석으로 위험을 자초했다. 만주사변이 최초의 잘못이며, 국제연맹 탈퇴, 3국동맹 체결 등이 뒤를 이은 잘못이다. 유럽에서는 독일에 대한, 중국에서는 군벌 지도자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수집과 분석이 균형 있는 국제감각을 잃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중 일본을 움직였던 육해군의 군 관료들은 엘리트 의식과 폐쇄주의를 앞세워 정책의 입안과 결정을 독점, 잘못된 전쟁으로 이끌었다. 의회는 전쟁을 무비판적으로 추인했으며, 신문도 여론 형성과정에서 보도의 사명을 포기했다.

전시 일본에는 군부를 중심으로 개인의 인명과 인권을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범람해 그것이 전쟁터에서 '옥쇄'와 '자살공격'이라고 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도쿄=김철훈 특파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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