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 사진은 데라우치의 대포 헌납장면"

2006. 11. 5.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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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퇴위 협박과도 무관, 1910년대 사진집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896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이른바 아관파천 장면을 담은 사진 중 하나로 한동안 알려진 자료가 실제는 아관파천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것으로 최종 확인됐다.

지난해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는 이런 주장을 제기하면서, 문제의 사진은 1907년 7월22일 고종 복위를 위한 친위 쿠데타를 시도하려던 대한제국 시위대를 일본군이 진압한 뒤의 장면일 것이라고 추정했으나 이 또한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1910년대 초반 일본에서 발간된 사진 자료집으로 밝혀졌다.

이런 사실은 한국영상문화사(사장 박종수)가 해제, 번역과 함께 5일 '일제가 강점한 조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한국병합' 관련 일본측 사진자료집인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에서 드러났다.

박종수 사장이 2001년 재일교포 모리다 도미아키에게서 구입한 이 사진집에 의하면 '아관파천 사진'은 메이지(明治) 39년(1906) 일본 육군장관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1852-1919)가 덕수궁 돈덕전에서 신식대포 여러 문을 이왕가(李王家)에 헌납하면서 그 사용법을 설명하는 장면인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집을 감수한 이민원 동아역사연구소장은 "아관파천 현장인 러시아공사관은 언덕에 있었기 때문에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넓은 대지가 있을 수 없는 데다, 무엇보다 러시아 영토인 공사관에 일본군이 들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의 사진이 아관파천과 무관한 것임은 명백하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1906년 돈덕전의 대포 헌납장면이라고 소개한 사진 설명은 일본측으로 보아서는 사실일 터이지만, 이를 통해 조선에 대한 일본의 무력시위 효과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이번 사진집에는 그동안 별다른 배경 설명없이 러일전쟁, 또는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무고한 양민학살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자료로 국사교과서 등지에서 제시되던 사진을 수록하면서 "일러 전쟁기간 중 군용철도를 파괴한 조선인을 사형에 처함"이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총살 장면 외에도 이 사진집에는 "총살 후 검시"하는 장면도 수록했다.

일본의 '한국병합'을 기념하기 위해 도쿄의 유락사(有樂社)라는 곳에서 발간한 이 사진집에는 원색과 흑백사진 200여 컷 외에도 ▲한국병합전말서 ▲조선사정 ▲조선의 부력(朝鮮之富力) ▲궁정비밀외교 ▲명사담총(名士談叢), 그리고 ▲명치일한외교소사와 같은 텍스트 자료가 추가돼 있다.

이 중 사진자료는 대한제국의 궁정과 그 내부시설, 당시 고종황제를 비롯한 황족과 고위관리, 조선통감부 및 총독부 관련 인물, 8도 풍물과 당시 조선인의 풍속 관련 자료 등을 망라하고 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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