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직·이영훈, 일본 돈 받은 '식민지 연구'

2006. 12. 11.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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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이영훈·안병직으로 대표되는 뉴라이트 지식인들의 '교과서 포럼' 때문에 한국 사회가 또다시 홍역을 겪고 있다. 이번 사건은 친일문제 및 박정희 문제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현재진행형'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영훈·안병직 교수는 자신에 대한 비판론자들에게 하나같이 다음과 같은 논지로 비판을 가한다.

"정치적으로 하지 말고 학술적으로 하자."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문제를 과연 객관적인 학술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도 의문이지만, 또 한편으로 그들에게 역(逆)비판을 가할 소지도 있다.

"학술적 문제 말고, 이들의 연구는 윤리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가?"

도요타 재단 지원금 받은 '식민지 근대화론 연구'

▲ <근대조선의 경제구조>에 실린 안병직의 서문.
▲ <근대조선 수리조합 연구>의 서문 중 일부. 연구의 기획단계에서부터 도요타 재단측이 참여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들에게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 학자들의 학문 연구가 기본 윤리를 위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들이 기본 윤리를 저버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학자의 식민지 근대화론 연구가 일본 기업의 자금지원 하에 진행됐기 때문이다.

기업은 이익이 없으면 한 푼도 투자하지 않는다. 게다가 일본 기업이 한국 학자들의 식민지 연구에 돈까지 지원했다면, 우리는 그런 일본측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다 식민지배의 피해자인 한국의 지식인으로서 일본측의 돈을 받고 식민지 연구에 착수했다면, 연구 성격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제자와 스승 사이인 이영훈·안병직 두 교수는 지난 1989년 및 1992년에 일본 도요타 재단(豊田財團)의 자금 지원을 받아 식민지 연구를 수행한 적이 있다. 도요타 재단이 지원한 이 프로젝트의 타이틀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한 역사적 연구'였다.

그 같은 자금 지원의 결과로 잉태된 연구 성과는 1989년 B 출판사에서 발행된 <근대조선의 경제구조>(이하 1989년 연구)와 1992년 I 출판사에서 발행된 <근대조선 수리조합연구>(이하 1992년 연구)다. '1차 공동연구'로 불리는 전자(前者)는 일본 학자 7명과 한국 학자 6명의 공저이며, 후자(後者)는 양국 각각 2명 도합 4명의 공저다. 총14명이 이 작업에 참여했다.

이 책들은 오늘날 식민지 근대화론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념비적 저작들로 평가받고 있다.

두 차례에 걸쳐 도요타 재단의 자금을 받아 식민지 연구를 수행한 총 14명의 학자들 중에서 일부를 거론하면,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 당시 교토대학 경제학부 교수,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당시 성균관대 교수),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K대 L 교수, 또 다른 S대의 L 교수, 또 다른 K대의 C 교수 등이 있다.

여기서 나카무라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핵심 인물이며, 위에 거명된 한국 학자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아성인 낙성대 경제연구소의 주요 멤버들이다. 현재 이영훈은 낙성대 경제연구소의 소장이고, 안병직은 이 연구소의 이사다. 그리고 위의 나머지 교수들도 낙성대 경제연구소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정리하면 낙성대 경제연구소 멤버들이 도요타 재단의 자금을 받고 이 연구에 대거 참여한 셈이 된다.

도요타 프로젝트와 낙성대 경제연구소

▲ 일본 도요타 재단의 홈페이지.
ⓒ2006 도요타 재단

도요타 프로젝트의 주체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 도요타재단이다. 이 재단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 단체는 도요타 자동차공업(주) 및 도요타 자동차판매(주)가 학문 진흥 등을 목적으로 1974년 10월 15일 일본 총리부(總理府)의 허가를 받아 설립한 법인이다. 도요타 재단의 회장은 도요타 자동차의 상담역을 겸하고 있는 도요타 다츠로씨다.

그리고 재단 사람으로 한·일 양국 학자들의 연구에 참여한 인물은 직원인 야마오카 요시노리(山岡義典)씨다. '1992년 연구' 서문에 의하면, 그는 도요타 프로젝트의 기획에서부터 출판에까지 관여했다. 특히 서문에서는 "동재단(同財團)의 야마오카 요시노리(山岡義典)씨는 공동연구의 구상에서 출판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관대하면서 헌신적인 도움을 주셨다"고 언급했다.

과연 이 재단이 한국의 식민지 연구에 자금을 지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연구 성과가 발표된 시점을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도요타 프로젝트는 1987년 10월경에 시작돼 1989년 및 1992년의 연구 성과를 내놓는다. 이 연구가 시작된 시점이 6월항쟁 직후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6월항쟁은 어떤 의의를 갖는 사건인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 사건을 조명할 수 있겠지만, 경제적·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에 이 사건은 한국 사회가 고도 경제성장과 정치적 민주화를 통해 안정된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놓고 일반 한국인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진 부류가 존재한다. 일반적인 한국인들은 6월 항쟁을 한국 민중의 자체적인 노력 및 투쟁의 결과로 인식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4년간 수십명이 동원된 연구

그들은 '제국주의도 아닌 식민지에 불과했던 한국이 어떻게 저런 기적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의 문제 의식은 '혹시 일제 식민지 시기의 경험이 한국인들이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한 것은 아닐까?'라는 가설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한 가설을 실증적으로 입증하고자 한 것이 바로 도요타 프로젝트의 취지였다. 이 점은 <근대조선의 경제구조>에 실린 안병직의 서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경제기적과 정치발전)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었던가 하는 그 역사적 과정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 지난날의 식민지사 연구를 통하여 그 해명을 위한 조그마한 실마리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 식민지였던 나라가 어떻게 하여 독립된 하나의 자본주의국으로 되었을까?"

▲ 서울대 이영훈 교수. 2004년 방송 토론에서 '일본군 종군 피해여성과 관련한 발언'으로 나눔의 집 할머니들을 찾아가 사과를 하기도 했다.
ⓒ2006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 서문에 따르면, 한국의 경제적·정치적 발전의 원동력을 규명하기 위하여 '지난날의 식민지사'를 연구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도요타 프로젝트의 목적은 일제 식민통치가 한국의 경제·정치 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다.

도요타 재단이 이 연구에 어느 정도의 지원금을 투입했는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지만, 객관적인 자료를 근거로 그 대강을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연구 인력, 연구 기간, 연구 규모를 통해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연구 인력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89년 연구의 저자는 총 13명이고,1992년 연구의 저자는 총 4명이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연인원 총 17명(실제 인원 14명)이 동원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다. 흔히 학계의 연구 프로젝트에는 교수급의 공동 저자 외에도 박사급 연구원과 대학원생들이 함께 참여한다. 저자로 이름이 올라가지 않은 대학원생들도 있다는 점은 1992년 연구의 서문에서도 금방 확인된다. 적어도 수십 명이 참여한 연구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연구 기간이다. 1989년 연구는 2년간 전국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1992년 연구도 2년간 진행되었다. 총 4년이 소요됐다.

마지막으로 연구 규모다. 1992년 연구의 경우에만 국한해서 살펴보면, 이 연구팀은 일제 시기의 수리조합 자료를 구하기 위하여 경기도·충북·충남의 도청·군청·시청·읍사무소·면사무소·상공회의소·농협·농지개량조합·은행·기업 등을 샅샅이 훓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자료의 복사·분류·분석·토론·워드 작업 등을 진행했다.

정확한 금액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위와 같은 점들을 볼 때에 도요타 프로젝트에 소요된 자금이 상당히 큰 금액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도요타 재단으로부터 연구비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이번의 공동연구는 출발부터 불가능하였다"고 1992년 연구의 서문은 밝히고 있다.

마지막으로 도요타 프로젝트의 효과 부분이다. 도요타 프로젝트 이후 한국 사회에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유포되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지배하지 않았으면 한국이 오늘날처럼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논리가 지식인 사회를 중심으로 한국에 유포됐다. 이 연구 이후 한국의 경제적·정치적 성장의 원동력을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본격화된 셈이다.

이영훈·안병직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의 힘"

이 점을 보다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1989년 연구와 1992년 연구에서 이영훈·안병직 두 교수가 어떤 주장을 하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이영훈은 1989년 연구에서 조선의 자체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그는 '일본이 아니었으면 조선은 근대화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논리를 세우기 위하여 내재적 발전론자인 김용섭 전 연세대 교수의 논리를 부정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김용섭은 대한제국 시기에 실시된 '광무 양전(量田) 사업'을 근대적·부르주아적 개혁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는 조선 내부에 주체적인 자본주의화·근대화의 맹아 즉 원동력이 있었음을 긍정하는 논리다.

이에 대해 이영훈은 충남 연기군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부실하게 진행된 양전사업에서 근대적·부르주아적 개혁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일제 강점 이전의 조선 내부에는 근대화의 원동력이 없었음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영훈은 1992년 연구에서 일제 식민통치가 조선 민중에게 반드시 해악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하여, 충남 마구평 수리조합의 사례를 제시하였다. 마구평 수리조합을 주도한 것은 일본인 지주들이지만 조선 농민들도 그로부터 혜택을 입었다는 것이다.

이영훈은 두 차례의 연구를 통해서 일제 강점 이전의 조선에는 주체적 근대화의 원동력이 없었으며, 일제 식민통치가 조선인들에게 반드시 고통만을 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전개했다. 이는 한국의 경제적·정치적 성장의 공로를 우회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게 돌리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의 스승인 안병직 역시 1989년 연구에 실린 '식민지 조선의 고용구조에 관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2가지 주장을 하였다.

▲식민지하에서 조선 농촌의 값싼 노동력이 공업 노동력으로 전환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의 강제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선 민중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식민지 공업화 과정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비록 일본인 노동자들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질적 발전을 경험하였다.

여기서 특히 두 번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식민지하에서도 조선인 노동력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주장은 식민통치가 조선인들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의미를 우회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영훈·안병직은 도요타 재단의 자금 지원으로 이루어진 연구에서, 일제 강점 이전의 조선에는 주체적 근대화의 원동력이 없었으며, 일제 식민통치가 조선민중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1970,80년대 한국의 경제적·정치적 성장의 공로를 일본제국주의에게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 연구 활동

이영훈·안병직으로 대표되는 낙성대파 학자들은 일본 도요타 재단의 자금 지원에 힘입어 식민지 근대화론에 관한 2권의 기념비적 서적을 펴낼 수 있었다. 식민지 문제를 연구하면서 그 식민지의 가해자인 일본의 대표적 기업으로부터 연구자금을 지원받는 것은 윤리적 논란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일제 식민통치가 조선에 혜택을 주었다'는 것이 자신의 신념이고 그것을 연구 성과로 만들고 싶다면, 그런 연구는 자기 비용으로 수행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일본측의 자금 지원을 받아 식민지 연구에 착수한다면 그 연구는 원초적 하자를 내포한 연구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운동을 평가 절하하고, 더 나아가 4.19를 부정하고 5.16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영훈·안병직을 과연 어떻게 봐야 할까. 정치적인 성격이 아주 명확한 뉴라이트의 중심에 이들이 있다는 것도 걸리는 문제이기는 마찬가지다.

"정치적으로 하지 말고 학술적으로 하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결코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연구비 지원은 세계적 관행, 문제 없는 연구"

[이메일 인터뷰]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 안병직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
ⓒ2006 오마이뉴스 권우성

일본 도요타재단의 지원을 받아 '식민지 연구'를 했다는 김종성 기자의 기사에 대해 <오마이뉴스>는 당사자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반론을 들어봤다. 다음은 안 교수와의 이메일 인터뷰다.

- 안병직 교수와 이영훈 교수가 공동연구를 진행한 두 저작 <근대조선의 경제구조>(1989년), <근대조선 수리조합연구>(1992년)가 일본 도요타 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뤄진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도요타(豊田)재단으로부터의 연구비수령에 대하여 1988년으로부터 3년간 동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수령하고, 16명의 한일연구자가 공동으로 연구를 수행해 세 권의 저서를 출판했다. (근대 조선공업화 연구도 있음). 연구비를 지원받을 때에는 지원사실을 밝히는 것이 의무사항이기 때문에 각 저서마다 연구비수령 사실을 밝혔다."

- 도요타재단으로 지원을 받은 금액은 얼마인가.

"지원금액은 300만엔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예비연구를 위해서 100만엔 더 지원받았을 수도 있다."

- 일부에서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연구가 일본 기업 재단의 지원금으로 진행된 것을 두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기업이 설립한 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 받는 것은 세계적 관행이다. 우리의 연구가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했다고 보는 것은 우리의 연구를 읽지도 않고 악의를 가지고 우리를 비난하려는 자들의 소행으로 생각한다.

본래 연구는 진실파악이 주된 목적이다. 16명의 연구자가 남에게 매수돼 3년간이나 연구할 만한 연구비 규모인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문제다.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애국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개는 객관적 사실을 파악하려고 노력도 하지 않고 밥이나 축내는 게으른 자들인 경우가 많다." / 김영균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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