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신부' 공베르를 아십니까

2007. 2. 4.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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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증조부의 큰 형님이었던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조선에 양조용 포도나무인 '뮈스카'를 처음으로 가져가 심었고, 조선 사람들에게 그것을 먹게 했습니다. 증조부의 형님께서 조선 사람들에게 포도를 먹게 했듯이 나도 한국인들에게 포도주를 맛보게 하고 싶습니다."

프랑스 남부의 랑그독 루시옹에서 최근 개최된 '남프랑스 와인 포럼'에 자신의 와인 '도멘 드 잘리에'(Domaine de Jalier)를 출품한 자비에 공베르(Xavier Gombert·45)는 기자를 보자 대뜸 와인부터 따라주었다. 자비에는 "조선말 한국땅에서 활동했던 나의 선조 앙투안 공베르 신부를 아느냐"고 물었다.

자비에의 설명에 의하면, 증조부의 큰형인 앙투안 공베르 신부(Antoine Gombert·1875~1950)의 고향은 프랑스 남부 캄블라제. 앙투안 신부는 1900년 10월 2살 아래인 동생 줄리앙 공베르(Julien Gombert)와 함께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됐다. 앙투안 형제의 첫 부임지는 안성. 이 도시엔 당시 단 한 명의 한국인 신도가 있었다. 앙투안 신부 형제는 안성에 천주교 성당(현재 안성 구포동성당)을 짓고 50년 동안 조선인들을 도우면서 이들을 교육했다.

앙투안 신부는 1914년 프랑스로 잠시 귀국했다가 4년 후 한국에 되돌아갔다. 그는 이때 와인과 성경책 등 500여권을 한국으로 가져갔다. 자비에는 "공베르 신부가 프랑스에서 포도나무를 가져간 것은 미사용 포도주를 조달하려는 목적이 있었겠지만, 가난한 조선인 농민들에게 제공하려는 뜻이 더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앙투안 신부는 한국전쟁 중 납북돼 1950년 11월12일 '죽음의 행진' 끝에 압록강 인근에서 추위와 배고픔으로 사망했다.

1977년부터 포도밭을 운영중인 자비에는 현재 레드와인 5종, 로제와인 2종, 화이트와인 3종을 생산하고 있다. 그는 "언젠가 한국을 방문해 앙투안 신부가 관리했던 포도밭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몽펠리에(프랑스)|손현주기자 hjs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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