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경향신문

[여적] 개근

입력 2007. 03. 20. 20:11 수정 2007. 03. 2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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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은 프로야구 악바리 계보 첫 머리에 이름을 올린 선수였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을 '악으로, 깡으로'로 해석하며 1987년 신인왕으로 출발한 그는 연속경기 안타 기록을 세우며 수차례 타격왕에 오르기도 했다. 몸이 부서져라 연습하고 경기에 임하는 투혼뿐만 아니라 선동열의 시속 150㎞대 강속구를 정확하게 보고 칠 수 있는 재능까지 지녀 프로야구 대표팀의 1번타자를 도맡아 했다.

그러나 그의 전성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좌우명인 '악으로, 깡으로'가 문제였다. 아프거나 다치면 충분히 쉬어야 함에도 참거나 심지어는 숨기며 경기에 나서 작은 부상을 큰 부상으로 만들었다. '쓰러져도 그라운드에서 쓰러지겠다'는 각오는 칭찬할 만하지만 그건 고작 10일 정도에 결승전까지 치르는 아마추어 시절 승부사의 요령이다. 6개월간 장기레이스를 벌이며 10년 이상 인생의 승부를 걸어야 하는 프로야구 등에선 짧은 생각이다.

아프다는 것은 무리했으니 좀 쉬라는 몸의 신호다. 몸이 속삭이는 최초의 경고를 뿌리쳤다간 필경 더 큰 일을 당하게 된다. 아플 만하니까 아프고 아플 때가 돼서 아픈 것이지 그냥 아픈 경우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등상보다 3년 개근상을 더 중시하고 근면·성실을 덕목으로 삼은 사회의 오랜 관습과 교육 때문에 아픈 걸 꾹 참고 꾸역꾸역 학교나 직장에 나간다.

잡코리아가 직장인 75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거의 전부(96.8%)가 '아파도 참고 출근하고' 그중 절반가량(46.9%)이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는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서(46.9%)'라는 이유를 들었다. 한국인다운 기질이 드러난 결과이고 CEO들은 '조직 충성도'를 들먹이며 좋아할 터이다. 그러나 미국의 코넬대학과 기업법률자문회사 CCH는 그런 프레젠티즘(Presenteeism·출근은 했지만 비정상적 컨디션이어서 업무성과가 떨어지는 현상)이 앱센티즘(Absenteeism·결근을 함으로써 생기는 생산성 저하)보다 실이 많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상습적인 꾀병이나 술병이 아니면 '쓰러져도 회사에 가서 쓰러진다'는 '악바리 출근'을 은근히 강요하기보다는 마음놓고 쉬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휴식과 게으름은 다르다.

〈이영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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