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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 많이 울었지만 너무 아쉬워"

입력 2007. 08. 19. 13:53 수정 2007. 08. 19.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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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경태 기자]

▲ 영화 <화려한 휴가> 중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 장면
ⓒ2007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개봉된 후 지난 10일 <오마이뉴스>에 실린 <화려한 휴가> 관련 기사에 장문의 댓글이 달렸다. '20년만의 고백 :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라는 글이었다.

1980년 5월 그 참혹했던 현장을 기록한 이 글은 1999년 <당대비평> 겨울호를 통해 처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후 2000년 제9회 전태일 문학상의 생활 기록문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 참혹한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24살 계엄군은 지금 경기도 평택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피 흘리며 쓰러져있던 광주 시민을 구했다가 즉결처형 위기까지 맞았던 계엄군. 이경남 목사가 본 영화 <화려한 휴가>는 어땠을까. 17일 평택의 찻집에서 이 목사를 만났다.

- <화려한 휴가> 보셨나요?

"많이 울었습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영화 자체만으로도 슬프지만 그때 기억이 다시 떠올라서 더 그랬지요."

▲ 이경남 목사는 1980년 5월 19일 제11공수여단의 일병으로 광주에 투입됐다.
ⓒ2007 오마이뉴스 이경태

영화보다 더 참혹했던 5월 광주

그러나 이 목사는 영화가 5월 광주를 충실하게 재현했는가라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이 목사는 영화의 극적 효과를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도청 앞 발포사건이나 시민군과 군인과의 교전장면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이 목사는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 11공수여단 63대대 9지역대의 일병으로 서 있었다. 중무장한 군인들은 시위 중이던 수만의 군중과 대치 중이었다.

군경 저지선을 향해 시위대의 차량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저지선에 있던 군인들은 황급히 좌우로 갈라져 차량을 피했다. 군인들 앞에 서 있던 장갑차도 황급하게 후진했다. 후진하던 장갑차의 캐터필러에 깔려 최초의 군인희생자가 발생했다. 이 목사와도 친했던 63대대 8지역대의 권용운 일병이었다.

권 일병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이 목사는 정신이 없었다. 지휘관은 하얗게 질려버린 이 목사를 도청 안 지하실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오후 1시 금남로에 모인 시위대를 향해 군인들의 사격이 시작됐다.

"도청 안에서 정신을 수습하고 있는데 중사 한 명이 들어와서 '그 녀석들이 내 부하를 죽여서 무차별 난사했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군요. 그때까지도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했어요. 아무리 수만의 시위대에 포위됐고 군인의 희생이 발생했더라도 시민들한테 총을 겨누고 쐈다니…."

이 목사는 군인들의 퇴각도 시민군과 교전이 격화되며 이뤄진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 목사는 군인들이 퇴각할 때 금남로에 남은 시민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오후 5시쯤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군인들에게는 일발의 총격도 없었습니다. 퇴각하는 장갑차에서 간헐적으로 위협사격을 해댔고, 분수대와 전인빌딩 앞에 남은 군인들이 '엎드려 쏴' 자세로 혹시라도 있을 시민들의 진입에 대비했습니다. 만약 영화에서처럼 시민들이 무력으로 군인들을 도청에서 몰아냈다면 분수대와 전인빌딩 앞에 엎드려 있던 그들부터 죽었을 겁니다. 군인들은 그저 작전상 일시 후퇴를 한 겁니다."

이 목사는 영화에서 그려진 27일 도청 탈환 작전도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 목사는 도청에 남아있던 시민군이 M1 소총으로 무장했다고 하지만, M16으로 무장하고 실탄 560발, 수류탄, 가스탄까지 가지고 있는 군인과 정상적인 교전을 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도청 안에 남아있던 이들이 적극적으로 저항했다면 군인 사상자가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발생한 군인 사상자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군대는 몇 십 명의 시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헬기와 탱크까지 동원했죠. 결국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은 '학살'당한 것입니다."

▲ 이경남 목사는 '화려한 휴가'가 광주를 깨끗이 정리하는 출발이 되길 소망했다
ⓒ2007 오마이뉴스 이경태

아직 치유되지 못한 5월 광주의 아픔

"도청 안에 있던 이들은 간절히 외부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주길 기다렸습니다. 윤상원씨가 미 대사관에 구원을 요청했던 까닭도, 전옥주씨가 광주 시내를 돌며 '살려 달라'고 호소했던 것도 그들의 간절한 기다림입니다. 그런 고독, 긴장, 두려움이 영화에 좀 더 살아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이 목사가 기억하는 5월 광주는 영화보다 더 참혹했다. 그래서 그 아쉬움이 더 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목사는 <화려한 휴가>의 의미가 충분히 있다고 평가했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인 이상 이런 아쉬움은 어쩔 수 없겠죠. 오히려 이 영화를 통해서 광주에 대해서 몰랐던 이들이 뒤늦게나마 광주를 이해하고 당시 신군부의 만행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을 품게 한 것만으로도 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 목사는 5월 광주가 '내란'에서 '민주화항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섭리를 보았다고 했다.

"5월 광주 이후 20년 동안 긴 침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회 변혁을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느꼈습니다. 하지만 당시 기세등등했던 신군부가 몰락하고 양심 있는 이들의 투쟁으로 역사의 시계가 바로잡히는 것을 보면서 어떤 은폐된 진실도 결국 드러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에게 영화 <화려한 휴가>는 현실로 옮아와 있었다. 이 목사는 이 영화를 통해 형성된 공감대가 발전해 아직도 남아있는 군부세력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솔직히 영화 <화려한 휴가>가 정치계에 영향을 끼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는 아직 광주를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책임자 처벌도 애매하게 끝났고 그 당시 실종됐던 70여명을 찾지도 못했습니다. 광주를 고립시키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키는 신군부를 묵인한 미국을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국민들이 선한 국가로 인식하고 있고요.그런데 벌써 광주의 아픔을 망각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스스로 일어나 독재정권을 몰아낸 국민들이 군부독재의 출발점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도 5월 광주를 깨끗이 정리하지 못한 탓입니다.지금 한나라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있는 박희태 의원이 5공 청문회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을 얼마나 변호했는지 사람들은 다 잊은 것 같습니다. 아직도 5공 인사들이 주도하고 있는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이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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