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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 3국의 역사 바로세우기 "러시아를 고소하라!"

입력 2007. 09. 20. 13:48 수정 2007. 09. 20.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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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서진석 기자]

제1차 강제이주가 이뤄진 6월 14일은 리투아니아에서 강제이주 희생자를 추모하는 날이다. 행사 기간 중 학살희생박물관 벽에 걸린, 시베리아 강제이주를 주제로 한 어린이들의 그림 1.

ⓒ 서진석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는 반 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남아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이 곳 발트3국이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발트3국을 지배했던 소련이 곳곳에 흔적을 남겨놓았고,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치료받지 못한 상처가 급히 봉합되면 더 큰 상처가 되는 법. 주변 여러 나라들로부터 "과거지향적인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한다"는 쓴 소리를 들으면서도 발트3국이 '과거청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그 때 상처에 아파하며 피 흘리는 이들이 주변에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라트비아]

66년 만에 러시아를 법정에 세운 70대 노인

구나르스 톰스.

ⓒ www.siberiaschildrenfund.org

그동안 발트3국의 과거청산은 현지 정부의 개입이나 집단행동에 의해 움직여왔다. 그러나 얼마 전 라트비아에서는 수도 리가에 사는 한 노인이 거대한 러시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41년 소련의 지휘에 따라 움직였던 라트비아인들의 시베리아 강제이주 책임을 물어 구나르스 톰스라는 이름의 70대 노인이 올해 9월 6일 유럽인권법정에 러시아를 고소한 것이다. 톰스의 가족들은 당시 부당하게 시베리아로 끌려가야 했으며 그 결과 객지에서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재판에서 톰스가 승리하면 소련의 공식 후계자인 러시아는 그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배상금으로 100만 유로, 강제이주에 대한 배상금으로 12만8000 유로를 지불해야 한다. 물론 그 경우 공식 사과도 해야 한다.

톰스는 1941년 여름 부모님과 세 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동물우리 같은 기차에 실려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에 있는 한 마을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열성 민족주의자였다는 이유였다. 그의 아버지는 1943년 굶주림 때문에 집단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톰스가 이번 재판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죽음이다. 그의 어머니는 비밀경찰에 체포돼 1941년 형식적 재판을 받은 후 총살형을 당했다. 그렇게 총살을 시켜야했을 만큼 무거웠던 어머니의 죄목은 아직도 알려진 바가 없다.

라트비아가 러시아에서 독립한 후 톰스는 가족들이 시베리아로 끌려가야 했던 이유와 부모가 그렇게 죽어가야 했던 경위를 러시아에 끈질기게 추궁했으나, 러시아는 언제나 둘러대기 바빴다. 인내에 한계를 느낀 톰스 노인은 러시아 문서보관소에서 어렵게 구한 자료들과 주변의 증언자들을 모아 관련 내용을 21개의 서류로 정리, 유럽인권법정에 상정했다.

이것이 상징적인 퍼포먼스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종전 이후 소련 지배에서 비롯된 문제들의 책임 소재와 보상 관련 문제에 종지부를 찍을 역사적인 사건이 될 것인지, 주변국들의 관심이 대단하다.

강제이주 희생자와 빨치산을 추모하는 돌탑. KGB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의 학살희생박물관 앞뜰에 만들어져 있다.

ⓒ 서진석

[에스토니아] 강제이주 책임 추궁당하는 '소비에트의 영웅'

공교롭게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웃나라 에스토니아도 시베리아 강제이주 관련 문제로 사회가 시끄럽다. 게다가 에스토니아의 경우 독립 이후 창설된 에스토니아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던 레나르트 메리의 사촌형 아르놀드 메리가 이 사건의 중심에 서있기 때문에 더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옛 소련 시절부터 영화제작자로 명성을 날린 레나르트 메리 대통령은 독립 직후인 1992년부터 2001년까지 장장 10년 동안 2번의 임기를 거치며 에스토니아공화국 초대 대통령직을 역임했다. 경제 성장과 정치 안정에 많은 공로를 세운 레나르트 메리는 '에스토니아 현대정치사의 산 증인'으로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반면 그의 사촌형 아르놀드 메리는 소련 시절 최대의 명예였던 황금별 영웅훈장과 레닌훈장을 받았고, '소비에트 영웅' 중 한 명으로 불릴 만큼 공산주의 활동에 앞장선 사람이다. 88살인 아르놀드 메리는 현재 탈린에 살면서 에스토니아 반나치협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두 사람은 동전의 양면처럼, 에스토니아 사회가 안고 있는 대조적인 두 역사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아르놀드 메리는 1949년 3월에 있었던 시베리아 집단 이주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관돼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아르놀드 메리는 에스토니아 서부의 히유마라는 작은 섬 지역 주민 251명을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시키는 일에 직접 나서 진두지휘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가 히우마 섬에서 했던 일들은 약 80명의 증언을 통해 사실로 입증됐다.

그러나 아르놀드 메리는 강제이주 사건에 관여했다는 사실 자체는 시인했지만, 에스토니아 정부가 현재 지우고 있는 대학살 관련 죄목은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소련중앙정부의 감독관 자격으로 히우마 섬에 갔을 뿐이며, 이는 그 조치가 당시 법규와 일치하는지 조사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는데 정작 사건이 발생한 그 주간에는 아무것도 조사하지 못했으며 관련 문서를 제공받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에스토니아 텔레비전과 한 인터뷰에서 아르놀드 메리는 "내가 한 잘못이라면 사람들이 바다를 좀 더 편히 건널 수 있도록 좋은 배를 임대한 것밖에 없으며, 대학살의 운명에 처해있던 사람들을 도와준 것이 어떻게 죄가 되느냐"며 말하기도 했다.

아르놀드 메리는 현재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상태일 만큼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데다 여러 지병 때문에 앞으로 채 2년도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정작 얼마 전까지도 소련군 제복을 입고 공공장소에 등장하는 일이 많았고, 소련 전승 기념일 행사에 모습을 내보이기도 했다.

이 사건에 연루 아닌 연루가 되어있는 레나르트 메리 전 대통령은 작년 3월 사망(향년 76세)해 사촌형에 대한 그의 공식 견해를 들을 수는 없다. 그는 대통령 재임 중에도 이미 사촌형의 행적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을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안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불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푸틴 대통령의 대변인은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에스토니아 정부가 미래를 보는 대신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매우 유감이며 여전히 과거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했다고, 발트3국의 소식을 영어로 전해주는 <발틱타임스>는 전했다.

60만명 강제이주... 슬퍼할 자유조차 박탈당한 38년

발트인의 시베리아 강제이주는 2차 대전 중인 1940년 러시아가 발트3국을 점령하면서 시작됐다. 그 후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까지 강제이주는 몇 차례에 걸쳐 이뤄져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전체에서 약 60만명이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들이 이주해야 했던 지역 중엔 북극권에서 수십㎞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도 있었다.

강제이주가 시작되기 전 발트3국의 인구를 전부 합해도 1000만명에도 채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전 인구의 5%가 넘는 사람들이 이주된 셈이다.

당시 비밀경찰은 대부분 잠을 자고 있던 한밤 중에 사정없이 마을에 들어와 사람들을 깨우고는 아무 설명 없이 대략 한 시간 정도의 시간만 준 채,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여행 준비를 하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그 와중에 가방 몇 개만 챙긴 채 동물 우리에 실려 여러 날 동안 음식과 물도 제대로 제공받지 못한 채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많은 사람이 여행 중에 사망했지만, 다행히 살아남은 이들도 혹독한 현지의 조건을 이기지 못하고 강제노동이나 병·기아 등으로 사망했다. 이들의 죄목은 단 한 가지, 즉 반러시아 성향이었다. 1941년 6월 발트3국에서 시베리아 강제이주가 처음으로 실시된 날의 모습이다.

리투아니아에서만 1941년 6월 14일부터 18일까지 5일 동안 자그마치 1만6246명이 시베리아로 이송되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자취를 감추었음에도, 어느 언론매체도 그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소중한 이들을 잃어버린 이들에게는 함부로 슬퍼한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곳에 끌려간 이들 중 반수 이상이 어린이·노인·여성이었고 마을에서 무작위로 사람들을 끌고 갔다는 증언 등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소련 정부가 내놓은 그 죄목은 단지 허울좋은 구실에 불과했다. 그리고 트럭에 실려 기차역으로 이동을 한 직후 남자들은 가족들에게서 분리되어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러시아가 2차 대전에서 승리한 후 그들은 합법적으로 발트3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고, 그 후 더 많은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강제 이송되었다. 그 결과 현재 발트3국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 친인척 가운데 적어도 한 명 정도는 시베리아로 끌려간 사람이 있을 정도로, 옛 소련 시절 시베리아 강제이주는 모든 국민이 기억하는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스탈린 사망 후 많은 사람이 살아서 발트3국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런 행운을 누린 사람은 강제이주자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또한 돌아온 이들도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버린 조국에서 새 환경에 적응해야만 했다.

발트인이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된 사람들을 기억하며 마음껏 슬퍼할 수 있고 또 드러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지 대략 16년이 되었다(16년 전인 1991년은 소련이 무너진 해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알고 싶은 과거는 '명분 없는 과거청산'이라는 주변국들의 낙인으로 번번이 무시되었고, 그러는 사이 사실을 알고자 하는 또 다른 라트비아의 노인들은 오늘도 세상을 떠난다.

학살희생박물관 벽에 걸린, 시베리아 강제이주를 주제로 한 어린이들의 그림 2.

ⓒ 서진석

과거에 그들이 한 일을 직접 와서 보라!

이런 상황에서 리투아니아는 소련 시절 KGB의 문서를 인터넷에 공개했다. 리투아니아 학살 및 항거연구소의 주도 아래 발트3국의 역사학자들의 모여 과거 KGB자료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www.kgbdocuments.eu)를 만들기로 합의한 것.

이 사이트에서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KGB 문서들을 PDF파일로 변환해 대중에게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문서 중 상당수가 독립 당시 훼손 혹은 말소돼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소련 정부가 발트3국에 하달한 여러 종류의 문서들은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 이 사이트의 초기 화면에는 "'발트3국에서는 강제지배가 전혀 없었다'는 러시아 정부의 끊임없는 선전에 신물이 난 역사학자들이 모여 창설했다"는 소개가 실려 있다.

어찌 보면 진부해 보이는 과거청산 문제가 여전히 산적해 있는 이 작은 나라들의 움직임은 도저히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싸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발트3국의 무한도전을 먼 나라 이야기로만 들을 수 없는 이유는, 한국인들에게도 이와 똑같은 아픔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올해로 고려인이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송된 지 정확히 70년이 지났다. 중앙아시아에서 많은 고려인들이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은 누가, 어떻게 해결하고 보상해 줄 수 있을까.

www.kgbdocuments.eu 초기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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