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이 있는 자가 나라를 끌어가야 한다

2007. 10. 3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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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 정업원.

정업원구기 비각. 현판은 영조 어필이다. 정업원은 퇴락한 궁중여인들의 마지막 쉼터였다

ⓒ 이정근

행색은 남루했지만 여염집 아낙은 아닌 것 같았다. 단정한 용모에 빈틈없는 자태였다. 하인을 거느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거드름 피우는 사대부집 안방마님도 아닌 것 같았다. 헐레벌떡 달려온 여인은 양녕이 타고 가는 말고삐를 붙잡고 말을 세웠다. 갑작스러운 여인의 출현에 행렬이 잠시 혼란이 빠졌다.

"세자 저하! 세자 저하!"

창을 꼬나쥔 군사들이 눈알을 부라렸다. 세자는 개성에 있다. 세자는 경덕궁에 있는 충녕이다. 폐 세자 이제를 세자 저하라 부르면 국가에 역심스럽고 불경이다. 당장이라도 의금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다. 양녕 호송을 책임진 원윤이 눈감아 주었다.

울부짖던 여인이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양녕은 당황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인이었다. 호송하는 군사들도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돌발 사태를 파악한 군사들이 여인을 밀쳐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렬은 앞으로 나아갔다.

"세자 저하! 부디 평안하시오, 편안하시오."

양녕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여인은 경순옹주였다. 태조 이성계의 딸이다. 그러니까 태종의 이복동생이며 양녕의 고모였다.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 삼남매가 있었다. 방번과 방석 그리고 경순옹주다. 방번과 방석이 척살된 무인혁명 때 경순옹주의 남편 이제도 목숨을 잃었다.

태종이 경순옹주를 위로하며 후사를 돌보아 주겠노라 제의했으나 옹주는 거절했다. 지아비와 동생을 죽인 오빠의 호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죽음보다도 싫었다. 홀로 남은 경순옹주를 불쌍히 여긴 태조 이성계는 손수 머리를 깎아주고 정업원에 들어가라 명했다.

정업원에 기거하던 경순옹주가 태종의 내침을 받고 양녕이 귀양 간다는 소식을 듣고 잰 걸음으로 뛰어나온 것이었다. 가슴에 사무친 이복오빠에 대한 원한이 양녕을 뜨겁게 배웅하게 한 것이다.

숭인방에 자리 잡고 있는 정업원은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오갈 데 없는 궁중여인들의 쉼터였다. 혜화궁주가 선배였고 정순왕후 송씨가 후배가 되었다. 절집도 아니고 사가도 아닌 정업원은 퇴락한 궁중연인들이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경순옹주는 이곳에서 아버지가 멸망시킨 고려 공민왕 후궁과 동거하는 기이한 인연을 이어갔다.

양녕의 유배행렬이 청계천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를 건넜다. 이 다리는 훗날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 가던 단종이 그의 비 정순왕후 송씨와 이별하던 다리다. 이때부터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다리라 하여 영도교라는 이름을 얻었다.

▲ 살곶이다리.

전곶교

ⓒ 이정근

전관원(篆串院)을 지나 살곶이에 이르렀다. 살곶이에 다리(箭串橋)가 만들어지기 2년 전이다. 징검다리를 건넌 일행은 광나루에 도착했다. 나루터에는 양녕을 태우고 갈 나룻배가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부왕에게 불공(不恭)하였고 상서(上書) 또한 불공하였다. 죄가 심하였으나 죽지 않은 것은 주상의 덕택이니 어떻게 보답하겠는가? 불효(不孝)를 범하였으니 어찌 성상 보기를 기약하겠는가? 경은 개성에 돌아가거든 내 말을 전하라."

문귀와 작별한 양녕은 나룻배에 올랐다. 문귀는 돌아갔지만 호송 책임을 맡은 원윤과 최한이 군사들을 이끌고 동승했다. 순풍을 탄 나룻배가 강심을 향하여 미끄러졌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니 도성은 보이지 않고 야트막한 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태종이 사냥터로 즐겨 찾던 아차산이다.

고구려군의 침공을 받아 결사항전하다 백제 개로왕이 전사했던 아차산. 요동 벌판에 말 달리며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가 신라에게 내주고 멸망한 땅 아차산. 고려가 차지했고 조선이 차지하고 있는 땅. 한반도의 전략요충지 아차산.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차산을 차지한 세력이 한반도의 주인이었다.

'지금 현재 한반도의 주인은 누구인가? 조선이다. 조선의 주인은 누구인가? 백성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부왕은 군주라고 생각한다. 나도 아버지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부왕 이후 조선의 주인은?'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나룻배가 심하게 요동쳤다. 깎아지른 아차산 절벽에 부딪친 물결이 소용돌이치며 뱃전을 때렸다. 양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이름 모를 물새 두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오고 있었다.

▲ 아차산성

고구려가 축조한 아차산성. 서울 광진구 광장동에 있다.

ⓒ 이정근

'요(堯) 임금은 단주(丹朱)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순(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순임금도 상균(商均)이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우(禹)라는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요순시대(堯舜時代)를 열지 않았는가? 이들의 선양(禪讓)이 왜곡되고 미화되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건방지다. 귀양 가는 주제에 감히 요임금과 순임금을 자신과 견주다니 주제파악을 못해도 한참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과대망상증 환자 같다. 이래서 정신 이상자라는 소리를 들었고 해괴망측한 행동으로 부왕의 노여움을 사 귀양 가는지 모르겠다.

양녕은 자신의 폐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씌워진 위(位)를 스스로 넘겨줄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폐위라는 수단을 동원하여 선위(禪位)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발상을 전환한 자가 역사를 끌어간다고 하지 않았는가. 역사를 끌어간 선각자가 될 것인지 역사를 뒷걸음치게 한 죄인이 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아버지 이후 조선의 주인은 분명 나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충녕이 주인이 될 것이다. 적장자 계승 원칙이 어디에서부터 유래했는지 모르지만 명문화된 법은 아니지 않은가? 부왕의 뇌리에 각인된 장자계승 원칙은 관례였고 신앙이었다. 아버지의 신념을 깨트린 나를 세상 사람들이 불효막심한 자라고 손가락질해도 나는 후회하지 않겠다.'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홀가분했다. 아버지가 지워준 무거운 짐을 벗은 느낌이었다. 원해서 진 짐이 아니었다. 장자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타의에 의해서 진 짐이었다. 하늘을 쳐다봤다. 뒤따라오던 물새가 응답이라도 하듯이 끼륵거렸다.

양녕 생각, '국가는 능력이 있는 자가 끌어가야 한다'

부왕이 택현(擇賢) 할 수 있는 물꼬를 터준 양녕은 물 위에 떠 있다. 양녕을 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물은 흐르고 있다. 폐위도 유배령도 모두 흘러간 물이다. 흘러간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역사로 남는다. 정치와 통치에 쓰이는 치(治)라는 글자에 삼수변이 들어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국가는 능력이 있는 자가 끌어가야 한다는 것이 양녕의 생각이었다. 자신처럼 풍류 좋아하는 자가 용상에 앉아 있으면 후궁이 많아지고, 후궁이 많아지면 인척들이 발호하여 파당이 생기고, 파당이 생기면 국론이 분열된다고 생각했다. 명나라의 발톱아래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에게 국론분열은 망국의 길이라는 것이 양녕의 지론이었다.

능력이 없는 자가 위(位)에 앉아 있을 때 국가는 위태로워지고 백성들은 고달퍼진다는 것이 양녕의 생각이었다. 양녕의 이러한 생각은 훗날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왕위에 등극했을 때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묵시적인 지지를 보낸 것으로 극명하게 나타난다.

장자 혈통은 생물학적인 퇴화를 가져온다고 알려져 있다. 적장자 대통이 왕조의 쇠퇴를 가져올까봐 양녕 스스로 돌연변이를 일으켰다면 단일 왕조로서 500년 이상 조선왕국을 유지해온 이씨들에겐 축복이 아니었을까?

이제 공은 태종에게 넘어갔다. 양녕이 벗어던진 짐을 충녕이 지고 있다. 태종의 선택이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노기에서 비롯된 우매한 계책이었는지 미래가 판가름한다. 충녕의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배가 어느덧 섬말에 닿았다. 나룻배에서 내린 일행은 우묵골을 지나 유배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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