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땅, 개성공단]개성이라는 이름에 묻힌 향기를 찾고 싶다

2007. 11. 28.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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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일제 강점기의 기행문들을 요샛말로 고쳐서 엮은 두 권의 책을 펴낸 적이 있다. 한 권은 백두산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한 권은 남한, 곧 대한민국에 관한 것이었다. 책에는 모두 스물여덟 편의 기행문이 실렸을 뿐이지만 그 책을 엮어내기까지 5년이 넘는 기간에 읽은 기행문은 수백 편에 가깝다. 물론 그중에는 조선시대부터 개성을 유람한 기록도 있었다. 임계(林溪) 유호인(1445~1494)이나 나재(懶齋) 채수(1449~1515)와 같은 조선 전기의 선비들이 남긴 '유송도록(遊松都錄)'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들은 같은 해인 1477년에 송도를 다녀왔으며 채수는 양력 4월 26일부터 5월 7일까지, 본디 같이 가기로 약속했다가 집안 일이 겹치는 바람에 동행하지 못한 유호인은 6월 6일부터 17일까지 둘 다 11박 12일의 여정으로 다녀왔다. 그 뒤 둘은 '유송도록'이라는 같은 이름의 기행문을 남겼다. 그렇지만 흥미로운 것은 유호인의 글이 채수의 글보다 두 배가량 길다는 것이다. 물론 길다고 잘 쓴 것은 아니지만 둘의 관점이 서로 달라 보고 느낀 것이 그만큼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양에서 출발한 그들의 노정은 어슷비슷하여 파주를 거쳐 임진강을 건너서 이틀 만에 송도에 다다른다. 그러나 이들처럼 사사로이 떠나는 여행이 아닌 연경으로 가는 사신 행렬들은 그 수가 많아 빨리 움직이지 못했다. 1803년의 기록인 '계산기정'의 노정을 살펴보면 그들은 지금의 무악재와 구파발을 지나 성으로부터 40리 떨어진 벽제관에서 하루를 묵어야 했다. 그러고는 혜음령을 넘고 광탄을 거쳐 다다른 파평관에서 다시 하루를 묵었으며 벽제관에서 파산서원 언저리에 있었던 파평관까지 거리도 대략 40리였다. 그 다음 날은 장단으로 임진강을 건너야 했는데 화석정 근처의 임진나루를 통해 건넜다.

강을 건너면 지금은 민통선 지역에 속한 동파리 일대의 동파역에서 10리를 더 나아가면 비무장지대 안에 파묻혔을 임단관이었으며 이내 송도의 태평관에서 피곤한 다리를 쉴 수 있었다. 사신 일행들은 가벼운 차림의 여행객들보다 하루가 더 걸린 셈이다. 그러나 그 길은 일제 강점기에 철로가 놓이면서 잊힌 길이 되고 말았다. 기차를 탈 형편이 되지 않거나 길 주변에 살던 사람들이 아니라면 굳이 그 길을 걸어서 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성은 그리 먼곳이 아니다

그것뿐 아니다. 새우젓이나 소금을 싣고 서해로부터 올라온 큰 배가 다다를 수 있는 임진강의 마지막 포구인 고랑포는 일제 강점기만 하더라도 큰 배는 물론 개성과 한양으로 오가는 '도라꾸(트럭)'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인근을 통틀어 고랑포 시장만한 큰 장이 없어 개성의 산물들이 집결했기 때문이다. 시장 상인들이 돈을 갹출해 일 년에 한 차례씩 치렀다는 고랑포의 고창굿은 며칠을 두고 이어졌는데 어린 무동 일곱 명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무동들은 고랑포나 인근 지역주민들의 아이들이 아니라 개성권번에서 곱상하게 생긴 어린 아이들을 데려와 무동으로 삼았다. 이처럼 경기 파주 일대에서는 개성과 왕래한 이야기들이 임진강 하류의 푸진 강물만큼이나 흔하다.

그렇다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개성은 그리 먼 곳이 아니다. 이제는 부산에서 아침부터 KTX를 타고 떠난다 하더라도 서울에 도착해 다시 경의선을 갈아타며 서두르면 개성에 다다라 점심을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또한 시내는 아니지만 개성공단으로 날마다 출퇴근하는 이들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개성이라는 곳은 그렇듯 단순하게 물리적인 거리로만 계산할 수 없는 먼 곳이다. 아니 촌로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금방이라도 냉큼 다녀오고 싶을 만큼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순간순간 이렇듯 혼돈스러운 개성은 분명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도 아주 가깝지만 상당히 먼 곳이며 멀지만 이내 닿을 수 있는 여전히 헷갈리는 거리 개념의 존재로 나에게 남아 있다.

1991년, 경의선 복원을 바라는 미술인들과 함께 모임을 만든 적이 있다. 그 모임에서 당시 경의선 모습을 촬영하여 기록했는데 끝나고 난 다음 문산역에서 개성까지의 거리가 그렇게나 가까웠음을 알고는 모두 놀란 적이 있다. 그것은 그 전 시대만 하더라도 개성을 갈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살았다는 것과 같다. 지도를 펼쳐보면 금세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 거리를 계산해볼 엄두조차 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체제 우월주의에 입각한 반공교육의 결과였으리라.

그 덕분에 내 마음 속에서 개성과의 거리는 멀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몇 년 전 개성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때의 설렘은 참으로 묘했다. 전후세대인 나로서는 개성의 모습을 전해주는 사진이나 그림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었으니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개성을 방문한다는 것을 안 다음 날부터 나는 책을 꺼내 들었다. 그 책은 최신의 안내 서적이 아니라 케케묵었다고 여길 수도 있는 송나라 휘종이 고려에 파견한 사신 중 제할인선예물관(提轄人船禮物官)인 서긍(徐兢, 1091~1153)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었다.

개성에 사찰이 무려 300개가 넘어

서긍이 고려에 들어온 것은 인종 1년인 1123년이었으며 그가 수도인 개성 순천관에 머문 기간은 6월 12일부터 7월 13일까지 한 달 남짓했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기록은 그처럼 짧은 기간에 보고 들은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방대하여 고려의 건국부터 당시의 생활상이나 종교, 습속에 이르기까지 그의 눈을 피해 간 것이 없었을뿐더러 묘사도 매우 세밀했다. 더구나 대략적이긴 하지만 인문지리학적인 조사까지 실려 있으니 그야말로 고려와 개경에 대한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고는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나 목은(牧隱) 이색(1328~1396)과 같은 고려시대 문사들의 문집을 뒤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은 개성지역에 산재해 있는 문화유적들 중 사찰에 대한 것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에 이어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니 당연히 사찰이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았으며 도성 내만 하더라도 무려 300곳이 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한 사찰들의 창건기나 중수기(重修記)와 같은 것들은 문사들이 도맡아 썼으므로 글을 통한 문화유산 답사를 미리 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장에 다다른 나는 공연한 수고를 했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었다. 시내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을뿐더러 더구나 제대로 남은 사찰은 찾아볼 길이 없었으니 유호인이나 채수의 기문에 등장하던 사찰들은 마치 꿈속의 한 장면처럼 스러져버린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관음사와 안화사 그리고 대흥사뿐이었다. 그나마 복원불사가 한창이던 영통사를 제외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어 송도를 찾은 조선의 선비들이 왜 그리도 폐허를 거니는 슬픔을 노래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선죽교마저 들리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그 슬픔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익재(益齋) 이제현(1287~1367)이 노래한 송도팔경(松都八景)도 막연하기만 하여 집 잃은 철새처럼 마음이 허허로웠다. 송도팔경은 전팔경과 후팔경으로 나뉜다. 전팔경은 곡령의 맑은 봄날(鵠嶺春晴)·용산의 깊은 가을(龍山秋晩)·자하동으로 중을 찾아가다(紫洞尋僧)·청교에서 객을 전송하다(靑郊送客)·웅천에서 계를 하며 술을 마시다(熊川 飮)·용야에서 봄을 찾다(龍野尋春)·남포의 안개 속 도롱이(南浦煙蓑)·서강에 뜬 달밤의 배(西江月艇)이며 후팔경은 북산의 안개비(北山煙雨)·서강의 눈보라(西江風雪)·백악의 비 갠 구름(白岳晴雲)·황교의 저녁놀(黃橋晩照)·장단의 석벽(長湍石壁)·박연폭포(朴淵瀑布)에 전팔경의 자동심승과 청교송객을 더한 것이다.

그때부터 마음을 달리 먹었다. 과거에 대해 천착하며 미리 공부한 까닭은 과거로부터 이어지지 않는 현재는 존재할 수 없으며 현재를 담보하지 않은 미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영화로웠던 500년 고려의 도읍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분단 이후 사회주의의 강력한 통치 아래 성장해온 직할시라는 명칭이 붙은 특급 도시일 뿐이었다. 자남산 마루에 우뚝 서 있던 김일성 주석의 동상은 물론 멀리 보이는 주체탑이 그것을 확인시켜주고 낯선 구호들과 낯선 표기법의 '리발소'와 같은 간판들이 그것을 다시 각인시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개성공단은 통일한국의 허리

남대문을 지났지만 문루에 걸린 연복사종(演福寺鐘)도 보지 못한 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낯선 도시를 탐닉하던 나는 그만 눈길을 거두고 말았다. 아직 개성으로 향하기 전 옛사람들의 글 속에서 개성을 노닐던 시간과는 현실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그저 멍한 시간을 잠시 보내야 했다. 마음속으로 꾸던 꿈에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 필요했으며 맞닥뜨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을 정리했어야 하니 말이다.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나는 이제 첨재(添齋) 강세황(1713~1791)이 그린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에서 아름답게 묘사한 개성의 모습에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또 옛 선비들의 기문이나 시에서 표현한 개성의 모습도 과거와 역사라는 이름 속에 묻어두고 때때로 꺼내어 묵은 향기만 줄 수 있는 아름다움에 젖기로 했다. 고려시대의 개성은 도읍지의 기능에 충실했다면 남한의 파주와 함께 현재의 개성은 통일시대에 남북을 잇는 완충지대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다.

개성이나 파주 모두 지정학적 위치로 봐서 한강 하구와 맞닿아 있으며 한강은 다시 서해로 나아갈 수 있는 육지의 고속도로와도 같은 길이다. 또 두 도시는 모두 한반도의 중심축에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통일 한국의 허리 역할을 톡톡히 해내야 할 곳이기도 하다. 꿈을 깨고 돌아오는 길, 과거의 개성에만 매달리기보다 미래의 개성에 천착하는 것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개성에서 내가 가졌던 들뜬 꿈은 깨어졌을지라도 새롭게 일구어야 할 꿈 하나를 안고 돌아왔으니 그저 허망한 걸음만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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