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창종자들]"차경석이 황제가 된다" 믿음 퍼져

2008. 3. 2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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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 차경석②

독립적립금 명목 성금 거둬… 일제, 금전사취사건으로 고발

민중의 마음은 누르면 튀어오르고 덮으면 퍼져나간다. 보천교가 조선 곳곳에 급격히 교세를 확장한 근간에는 일제의 탄압이 있다. 나라가 사라지고 의지할 곳 없어진 백성들은 보천교가 내세운 새로운 건국에 꿈을 싣고 있었다. 민간에서 차경석은 이미 새로운 나라의 주인공이 되었다.

"보천교에 쏠린 관심은 민중들의 독립운동 차원이었습니다. 강증산이 예언한 민족의 운명과 미래를 실제 집행할 대행자를 주장하며 나선 이 중 하나가 차경석입니다. 새로운 왕국이 세워졌고 차경석이 황제가 된다는 신앙이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한국종교학회 김탁 박사의 설명이다.

보천교는 실제로 신도들의 성금을 독립적립금이라는 명목으로 걷고 있었다. 독립이라는 대의명분에 열광한 조선 백성들이 기꺼이 보천교에 성금을 바치는 일이 늘어났다. 일제는 보천교인을 대상으로 금전사취사건으로 고발하는 일로 맞섰다.

1923년 1월 8일자 동아일보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보천교 선포사를 붙잡아 돈을 모은 죄목으로 조사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죄목 중 하나는 단발령으로 깎은 머리를 다시 기르게 하여 상투를 틀게 했다는 것이다. 보천교인은 사사건건 식민정책을 조롱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증산이 금산사 아래 오리알터를 중심으로 몇몇 제자에게 가르침을 폈던 반면 차경석은 전국에서 교도들이 밀려왔다. 1922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는 보천교의 신도 수를 대략 100만 명으로 파악했다.

보천교 본산이 있던 전라북도 정읍시 입석면 대흥리에는 방방곡곡에서 이주해온 신도들로 대규모 마을이 형성됐다. 대흥리 주민의 대부분은 보천교도의 후손들이다. 배규화(80)옹은 이렇게 증언한다. "인근에는 모두 보천교인만 살고 있었습니다.

제 부친도 교를 믿으러 대구에서 이곳에 와 정착했습니다. 같은 교인이던 모친과 혼인을 하고 여기서 저를 낳았습니다. 교주는 전국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위해 장터거리를 만들어줘 생업도 하면서 교를 믿고 살도록 했습니다."

교가 번성할 때는 1000여 가구가 교당을 중심으로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오가는 사람으로 일대는 늘 성시를 이루었다.

"당당한 풍채와 위엄 갖췄다"

인근마을 마석리 주민 남도희(86)옹은 당시 사정을 이렇게 말한다. "바로 옆인 우리 동네에는 보천교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흥리에는 거의 대부분 타지 사람이 왔어요. 무슨 날이 되면 멀리 경상도 하동, 함양, 경주에서부터 강원도 할 것 없이 전국에서 몰려와 길을 메웠어요.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가 또 돌아갔습니다."

노인들은 차경석이 당당한 풍채와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고 전한다. 문에 서면 건물 전체를 꽉 채울 정도여서 일제 관리와 경찰도 머리를 숙이고 눈을 피했다는 것이다. 새세상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한 용모였다.

1923년 8월에 발행된 '개벽' 제23호에는 차경석의 인상기가 실려 있다. 진주 출신의 필자는 보천교에서 상투를 틀고 조선 옷을 입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는 까닭에 가짜 상투를 달고서 겨우 차경석과 만났다. 그의 외모에 대해 "머리에는 통천관을 쓰고 의복은 순전히 조선에서 난 것만 입고 있으며, 과연 인격이 있어 보여 여럿이 받들 만하다"고 적고 있다.

이어 대화를 마친 후 이런 평가를 내린다. "세상 사람은 차씨를 일개 미신가이며 또한 무식한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유혹하여 금전을 사취하는 자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는 그렇게 무식한 이가 아니다. 비록 현시대의 지식은 모자란다 할지라도 구시대의 지식은 상당한 소양이 있다. 그의 엄격한 자태와 정중한 말은 능히 사람을 감복케 할 만하다. 그는 한갓 미신가가 아니라 상당한 식견이 있다." 보천교와 경쟁관계였던 천도교의 기관지에 실린 기사란 점을 감안하면 차경석의 인품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개벽'은 줄곧 보천교를 비판하는 기사를 싣고 있었다.

물산장려운동은 보천교의 민족중심주의를 잘 드러낸다. 민족경제를 살리기 위해 전개된 물산장려운동은 '조선사람, 조선 것'을 표방하고 나선 대표적인 민족생존권 운동이다. 1922년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양에 조선물산장려회가 세워지고 1923년 정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며 애국계몽운동의 선두 역할을 한다.

물산장려운동 핵심역할 맡아

일부에서는 조만식이 보천교의 내각기구에 해당하는 육임의 직을 맡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보천교와 협력한 것이 아니라 보천교의 핵심 인물이라는 것이다. 1923년 2월 13일 동아일보는 보천교에서도 음력 초하루부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할 것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최근 학계의 연구는 보천교가 물산장려운동의 핵심 역할을 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차경석은 교단의 중심지인 대흥리 일대에 자급자족의 경제기반을 조성한다. 일본산 옷감을 쓰지 않기 위해 직물공장을 만들고 염색공장까지 세웠다. 농기계 공장을 비롯해서 생업과 관련된 물품은 모두 조선의 것으로 쓴다는 것이 보천교의 기본적인 방침이다. 농촌지역에 어울리지 않게 근대 공장시설이 많은 것이 이 지역의 특징이다.

1920년대를 기점으로 보천교의 대사회적인 움직임이 커져가자 일제는 적극적인 와해공작을 펼쳤다. 보천교 신도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함께 한편으로는 언론을 이용해 사교라는 점을 강조하고 다른 편에서는 친일을 유도하며 회유했던 것이다. 민중으로부터 보천교를 떼어놓기 위한 술책은 서서히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항간에는 조선 총독 사이토가 보천교 본부를 방문했다는 소문과 아사요시 경무국장도 비밀리에 차경석을 만나러 왔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지고 있었다. 보천교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친일에 대한 의혹을 퍼뜨리는 데도 기여했다.

강증산은 생전에 차경석에게 예언 같은 말을 남겼다. "너는 집을 크게 짓지 마라. 그러면 네가 죽게 된다." 운명을 거슬리려는 듯 차경석은 1925년 1월부터 중심교당인 십일전(十一殿) 건설에 나섰다. 이미 건국을 선포한 시국(時國)의 궁전을 건설하려는 것이다. 차츰 조여 오는 탄압에 대한 돌파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민간에는 정감록 등의 비결과 예언서가 팽배해 있었다. 특히 정감록 징비록에 실린 '진사성인출(辰巳聖人出)'의 구절은 곧 닥칠 기사년(己巳年, 1929년)에 일어날 일로 믿어졌다. 진사년에 성인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십일전 신축과 맞물려 기사년 기사월 기사일에 새로 지은 궁전에서 천자로 오른다는 소식도 퍼져갔다.

근정전보다 두 배 큰 십일전 건립

십일전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1만 여 평(33만㎡)의 부지에 건평 350평(1155㎡), 높이 99척(30m), 가로 30m, 세로 16.8m에 이르러 패망한 조선왕조의 정전인 근정전보다 두 배나 크고 화려했다.

십일(十一)은 흙 토(土)자를 나타내니 보천교에서 말하는 세상의 중심이다. 그러나 차경석은 그 건물에 한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일제는 건축 당시부터 시비를 일으켜 1929년 십일전이 완공된 후에도 건물 사용을 불허했다. 결국 교단의 재산을 쏟아붓고 사용은 하지 못하게 되니 일제가 의도한 함정에 빠진 것이다.

시대일보의 인수가 실패로 끝나고 안팎으로 벌린 교단의 사업이 지지부진하면서 일제의 이간책이 성공하게 된다. 핵심 인원들이 혁신회를 발족하여 내분을 일으키고 일각에서는 차경석을 암살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교리를 둘러싸고 신파와 구파로 갈라지고 만다. 보천교에서 떨어져나온 신도들은 강증산을 교조로 삼는 다른 종단을 설립했다. 동화교와 수산교, 삼성교 등으로 교단이 분열되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언론은 악의적인 기사를 쏟아냈고 경찰은 보천교 본소에 주둔하며 출입자를 일일이 감시했다. 활로가 사라져갔다.

결국 1936년 3월 10일, 57세를 일기로 차경석은 세상을 떠난다. 당시 아홉 살의 나이로 임종을 지켜본 3남 차봉룡(81)옹은 이렇게 증언한다. "부친은 분사하셨습니다. 일제가 교를 억압하고 눈앞에 교당을 다 지어놓고도 들어가지 못하니 어찌 억울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수족을 잘라 조선이 망할 때와 똑같은 형국이었습니다. 화를 삭이지 못하시고 병이 들더니 별 말씀을 남기시지 않고 돌아가셨습니다."

몰려든 인파를 물리치고 일본 경찰은 유구를 빼앗다시피 하여 인근 산에 묻고 콘크리트로 덮어버렸다. 민중의 가슴 속에 차천자로 되살아나는 것이 그만큼 두려웠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야 겨우 봉인을 깨고 그 곁에 묘소를 만들 수 있었다.

일제는 교단을 강제 해산하고 재산을 공매처분한다. 십일전은 해체돼 땔감으로 팔려가고 나머지 재목의 일부는 당시 돈 500원에 팔려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다시 지어졌다. 건물은 3분의 1로 줄어든 초라한 모습이 됐다.

지상천국의 나라 시국(時國)도 사라지고 보천교도 사라졌다. 지금 보천교 본당에는 1년에 네 차례 제사가 있을 뿐이다. 멀리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겨우 맥을 지켜가는 15명 남짓한 간부 신자만이 참석한다. 묻어버리기엔 아까운 식민지 민족의 자각이 조용히 스러지고 있다.

김천<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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