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화상 입고 스트립쇼까지 쿠스쿠스의 질긴 트라우마

입력 2008.04.19. 13:26 수정 2008.04.19.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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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아프리카식 노란 좁쌀 같은 알갱이 …주방에서 학을 떼고 다신 안 만든다네

고백건대, 내가 시칠리아까지 흘러간 것은 <지중해> <시네마천국> <일 포스티노> 같은 영화들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널럴'하고 유쾌한 동네일 것이라는 기대가 충만했고, 게다가 그 사람들이 재밌기까지 할 거라고 제멋대로 상상했던 까닭이었다. 물론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종종 재미를 넘어 지나치게 엉뚱해서 문제였지만 말이다.

아프리카, 쾌속으로 달리면 두 시간

지중해 지도를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지중해라고 해서, 이탈리아나 스페인처럼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라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유고슬라비아' 같은 동유럽 나라도 엄연히 지중해에 옆구리를 적시고 있다. 아시아 나라도 빠지지 않는다. 중동의 여러 나라들이 지중해 짠물에 혀를 담그고 있는 거다. 아프리카도 뺄 수 없다. 모로코·알제리·수단·리비아야말로 원조 지중해가 아니냔 말이다. 그렇다. 아프리카!

내가 일하던 시골 식당 '파토리아 델레 토리'는 이탈리아에서도 시칠리아에 있다. 그런데 수도 로마보다 아프리카가 더 가깝다. 저 북부의 잘난 이탈리아 사람들이 '시칠리아는 아프리카다' 하는 비아냥거림이 옳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아프리카랑 가까운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쾌속정을 띄운다면 두어 시간에 아프리카 어디든 도착한다. 그래서인지 어딘가 아프리카 무어인을 닮은 이들도 눈에 띈다. 음식도 닮았다. '파토리아 델레 토리'뿐만 아니라 시칠리아의 식당은 대부분 아프리카식 요리인 '쿠스쿠스'를 요리한다. 파스타 같기도 하고, 우리 식으로 하면 무슨 '범벅'요리 같기도 하다. 좁쌀처럼 생긴 밀가루 가공품인데, 이게 여간 까다롭지 않다. 대충 익히면 까칠하고, 너무 익히면 푸석푸석해진다. 그래서 이 요리를 하자면 신경이 곤두서기 마련이다. 또한 쿠스쿠스 하면 시칠리아를 떠올리는 마당에 대충 요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엄마들이 된장찌개 하나는 제대로 끓이려고 애쓰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쿠스쿠스는 먼저 좁쌀처럼 생긴 알갱이를 잘 삶아야 한다. 그러고는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여러 가지 채소와 해물, 고기 따위를 익힌 후 미리 삶은 쿠스쿠스 알갱이와 한데 버무려 내야 한다. 올리브유에 마늘 타는 냄새와 수컷들의 땀냄새, 지중해 바다냄새까지 뒤섞이는 바쁜 저녁시간에는 북새통이 벌어진다. 그럴 때면 꼭 까다로운 손님의 불평이 쏟아진다. 일종의 주방 징크스다. 재료가 떨어진 요리만 주문이 빗발치는 것처럼 말이다.

"골파 대신 대파를 넣어 달라, 양파는 빼고 샬롯으로 향을 내 달라 …." 아니, 다 같은 파잖아! 종의 다양성이고 뭐고, 웬 파가 그렇게 종류가 많으냐고. 맥도널드에서도 '케첩은 빼고 양파는 익힌 것으로 넣고 오이피클은 조금만 넣어 달라'고 천연덕스럽게 요구하는 나라에서 이런 주문을 거부할 도리도 없다. 사고는 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생긴다. 꼭 무어인처럼 생긴 요리사 잔니가 '대파와 샬롯!'을 외치며 냉장고로 뛰어가다가 그만 내 발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불판 옆 바닥에는 올리브유와 미끈거리는 스파게티 가락들, 그리고 장어껍질처럼 미끄럽지만 정체는 알 수 없는 '무엇'이 툭툭 떨어져 있기 마련이다. 미끄럼 방지 신발을 신었지만 이럴 때는 도리가 없다. 그가 넘어지면서 엉겁결에 내 팔을 붙들었다. 맙소사! 내 팔은 마침 파스타 솥에서 꺼낸 뜨끈뜨끈한 쿠스쿠스 냄비를 붙들고 있었으니. "케 칼도 카초!"(앗 뜨거 빌어먹을! 이럴 때 이탈리아어가 튀어나온다면 진짜 이탈리아 사람이 다 된 걸 테지?) 커다란 쿠스쿠스 한 냄비가 왈칵 하늘로 솟구쳤다가 내 가슴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하필 덥다고 단추는 풀어놓았을 게 뭐람. 그러니까, 쿠스쿠스가 접시 대신 내 몸을 고른 것이다!

초짜들에게 인생 교훈을 던지는 튀김솥

허리춤을 앞치마로 단단히 졸라매고 있으니 쿠스쿠스는 밑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내 배와 등을 마음껏 유린하고 있었다. 넉넉히 흘린 땀이 윤활제 노릇을 하면서 쿠스쿠스는 키질하듯 돌아다녔다. 아아, 그만! 나는 스트립쇼를 해야 했다. 급하게 요리복 상의를 벗다가 단추가 투툭,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주방에서 여자 요리사를 별로 반기지 않는 이유를 알겠군.

그 소동 중에도 주방장 주세페는 태연자약했다. 늘 보던 광경, 흘러간 쑈쑈쑈였을 테니까 말이다. 역시나 산전수전 다 겪은 주방장답게 한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샬롯은 언제 꺼낼 거지? 쿠스쿠스는?" 대충 요리복을 갈아입고 다시 쿠스쿠스를 삶았다. 쏟아지던 주문이 줄어들자 뜨거운 쿠스쿠스가 신세졌던 내 배와 등이 쓰리기 시작했다. 벌겋게 살이 달아올랐다.

원수 같은 쿠스쿠스를 피해봐야 도처에 깔린 게 지뢰밭이다. 튀김솥은 그야말로 초보 요리사를 가지고 노는 녀석이다. 초짜들 손을 보면 칼에 벤 상처 말고는 대개가 튀김솥이 준 훈장들이 가득하다. 벌겋게 익은 상처들 말이다. 튀김솥은 초짜들에게 인생의 교훈을 던져준다. 보통 초짜들은 맹렬한 기세로 끓으며 혀를 날름거리는 튀김솥을 두려워한다. 물은 끓어봐야 100도지만 이건 200도 가까이 된다. 끓는 물과는 달리 피부가 훌렁 벗겨진다. 그래서 튀길 재료를 집어넣을 때 되도록이면 손을 튀김솥에서 멀리 하기 마련이다. 이게 함정이다. 이때 재료가 기름 속으로 풍덩하고 들어가게 되면 마치 삼류 다이빙선수처럼 엄청난 기름 거품이 일으킨다. 아악! 비명이 들리고 손등과 손목은 기름이 튀어 여지없이 물집을 만들어낸다.

이때 못된 선배 요리사를 조심해야 된다. 지나가면서 슬쩍, 당신의 엉덩이를 밀치고 지나가면서 당신을 튀김솥과 도킹하도록 만들지도 모른다. 런던에서 요리를 했던 내 후배 요리사 녀석은 더 심한 경험을 했다. "오븐을 조심해야 해요. 동양인, 게다가 자기보다 요리를 잘하면 질투하는 녀석들이 꼭 있죠. 오븐을 열고 들여다볼 때 뒤에서 확 밀고 지나갑니다. 팔뚝과 손바닥이 홀랑 익어 버립니다. 재수 없으면 얼굴이 웰던으로 익을지도 몰라요!" 그래, 런던의 웰던보단 시칠리아식 튀김이 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오븐은 아니지만, 냉장고를 가지고 초짜들을 놀려먹는 못된 고참들이 많다. 보통 큰 식당은 집채만한 워크인 냉동냉장고를 쓴다. 즉, 들어가면 갇힐 만한 조건이 된다. 초짜가 들어가면 밖에서 불을 꺼 버린다. 캄캄 지옥이 되면 초짜는 심한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게 냉동고라면 더욱 그렇다. 엄청나게 추운 냉동고, 아니 냉동방에 갇혀 보시라. 이런 공포가 따로 없다. 물론 안에서 문을 열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당황하게 되면 이런 생각을 까맣게 잊고 겹겹의 공포 속에 갇혀 버리게 된다. 내가 아는 한 녀석은 이 냉장고 장난을 당하고 공황장애가 생겨 요리사 생활을 그만두어야 했다. 극도의 공포 상태가 잠재되어 있던 질병을 불러온 것일 게다.

냉장고에 갇힌 뒤 요리사 그만둔 후배도

요리사들도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는다.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한마디로 '학을 뗀다'는 셈인데, 내게도 쿠스쿠스는 그렇게 학을 떼는 존재가 됐다. 그 다음부터 쿠스쿠스의 노란색 좁쌀 같은 알갱이는 쳐다보기도 싫어졌던 거다. 한국의 내 레스토랑에서는 쿠스쿠스 구경을 못한다. 무슨 알레르기처럼, 등판과 배에 좁쌀 같은 두드러기가 돋아날 지경이니까. 쿠스쿠스 요리를 피해 슬슬 딴짓을 하고 있었다. 벼락같이 주방장 주세페가 고함을 친다. "로베르토오~! 쿠스쿠스 5인분, 오케이?"

박찬일 뚜또베네 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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