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0대는 왜 초등학교 동창회에 설렐까

2008. 4. 24.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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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과거를 만나 오늘을 위로받는다 

올해는 유난히 4·5월에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이 많다. 12월의 송년모임 때보다 더 성황이라고 한다. 꽃피는 아름다운 계절이어서가 아니라 지난 대선·총선을 거치면서 동창회 행사가 '정치적 오해'를 살까봐 참고 있다가 봇물 터지듯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아이러브스쿨'이란 동창찾기 인터넷 사이트나 영화 '친구'의 영향으로 20·30대 층에서 동창회가 잠시 붐을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40·50대들에게 초등학교 동창회는 '필수 모임'이다. 그들의 말은 '삶의 활력소 역할'을 한다는 것. 초등학교 동창회에 오랜만에 모인 노인들의 지난 시절 발자취와 추억담을 전하는 뮤지컬 '마이웨이'도 얼마 전 충무아트홀에서 공연됐다. 머리에 흰서리가 내리고 가슴과 허리선이 구분이 안되는 나이, 선생님과 함께 모이면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중년들이 이토록 초등학교 동창회에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

꿈 많고 순수한 시절로 돌아가는 추억 여행

'보고싶다. 이번엔 약속 어기지마. 기다릴게. 이꽃순.'

아침에 샤워하는 사이에 휴대전화로 날아온 이 문자 메세지 때문에 김동석씨(46·서울 마포구 도화동)는 며칠 전 한바탕 부부싸움을 했다. 아내가 문자 메시지를 보고 "꽃순이가 어떤 여자냐"고 마치 바람이라도 피운듯 따지고 들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장롱에서 30년도 훨씬 넘은 낡은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꺼내 '이꽃순'이란 여자 동창을 보여주며 "얘가 초등학교 동창회 총무라 이렇게 안내 문자 메시지를 보냈고, 지난번 안 갔더니 자꾸 나오라고 하는 것"이란 구구절절한 변명을 하고서야 겨우 오해를 풀었다. 하지만 김씨는 이번 주말에 열리는 동창회에 갈 생각에 그런 오해나 아내의 잔소리쯤은 즐겁게 한 귀로 흘릴 수 있다.

"2년 전부터 초등학교 동창회에 다시 나갑니다. 몇몇 친구들은 10년 전부터 끼리끼리 모였나봐요. 중·고·대학교 동창회가 다 열리지만 초등학교 동창들처럼 푸근하고 편하지가 않아요. 매달 모이긴 벅차서 짝수 달에만 모이는데 매번 옛날 이야기만 하는 데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요. 얼굴은 영감이지만 마음만은 초등학생이 되는 것 같거든요. 유일하게 잔머리 굴리지 않는 모임이라 좋아요."

사업에 도움이 되는 인맥을 새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투자 정보를 얻는 것도 아니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나 꽃미남을 만나는 곳도 아니다. 그런데도 중년 아저씨, 아줌마들은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와서 자신들이 가장 순수하고 행복했던 시절로 함께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어 모인다. 지금은 교수, 택시기사, 변호사, 사장, 꽃집 주인, 의사, 포장마차 운영 등 각자 다른 명함을 내밀지만 그 명함으로 서로를 평가하지 않고 그저 '유난히 코를 많이 흘리던 코찔찔이' '항상 늦게 오던 지각대장' '도시락에 꽁치 한 마리를 반찬으로 싸오던 통큰 아이' 등 초등학생 시절의 특징으로만 기억하고 그대로 인정해준다.

이곳에서는 대학 총장이나 유명 스타도 그저 똑같은 친구일 뿐이다. 작가 공지영씨도 "초등학교 동창회에 갔더니 35년 전 짝이었던 남학생이 '어떻게 너 같은 말괄량이가 소설을 쓸 수 있냐'고 하더라"며 소감을 밝혔다. 마흔을 바라보는 톱스타 정준호씨는 충청도 초등학교 모임에 다녀온 후 "친구들이 부부동반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걸 보니 장가가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된다"고 전했다.

경북 문경 신기초등학교 7회 졸업생으로 재경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정도신씨(55·사업)는 "이제 대머리 영감과 손자까지 둔 할머니가 되었어도 항상 처음 만났을 때 개구쟁이들처럼 초등학교 교실로 돌아가는 것 같다"면서 "동창생들과 만나 실컷 웃고 떠들고 나면 알부민 주사를 맞은듯 개운해진다"고 말했다.

바로 어제 들은 이름은 기억나지 않고, 당장 몇시간 전에 풀어둔 시계가 어디에 있는지 까마득하기만 하지만, 30~40년 전의 일들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고 서로 기억나지 않는 부분은 퍼즐 맞추듯 전하며 타임머신을 타고 옛 시절로 돌아가는 즐거움을 이 나이에 어디에서 찾으랴. 갑자기 전학간 여자 동창을 찾아 무작정 기차를 타고 그 친구 집에 갔다가 여자친구 아버지에게 빗자루로 호되게 맞은 일, 친구 도시락 몰래 꺼내먹고 개구리를 넣어둔 일, 소풍갔을 때 순희의 고무신을 감췄던 일…. 이젠 공소시효가 지나 더 과장되게 무용담을 늘어놓고 지난 일을 고해성사한다. 신기한 것은 아무리 주름이 늘어나고 다른 직업을 갖고 있어도 원형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때 새침했던 영희는 지금도 새침하고, 그때 까불던 창식이는 여전히 주책스럽고…. 딱지치기나 고무줄놀이 대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면서도, 칠성사이다가 아니라 소주를 마시면서도 초등학교 동창회에서만은 소년, 소녀가 된다.

중년층의 초등학교 동창회의 특징은 여학생들이 더욱 적극적이라는 것. 아이들 뒷바라지나 남편의 눈치에서도 자유로워진 아주머니들이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남자 동창인 남성을 만날 수 있고, 다른 모임과 달리 잘살거나 못생겼거나 차별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서울 청운초등학교 출신인 이은송씨는 "동창생끼리는 서로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하는데 이 나이에 또래 남자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며 즐거워했다. 또 다른 동창회보다 결속력이 좋은 것은 중학교 이상은 거리가 먼 곳에 사는 학생들도 모이지만 초등학교의 경우 학교 근처에 형편이 비슷한 이들이 모여 성장환경도 비슷비슷하고 나이들어서도 큰 차이가 없어 편하단다.

물론 모든 초등학교 동창회가 다 아름답지만은 않다. 다단계 판매에 가입을 권유하거나 "급한 일이니 돈 좀 꿔달라"면서 동창들에게 돈을 거둬 해외도피한 이도 있다. 드물게는 오랜만에 찾은 초등학교 첫사랑과 불륜에 빠진 커플도 있다. 어느 모임에나 마찬가지이지만 돈자랑, 자식자랑에 과시를 하는 친구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하고, 매번 2만원 정도의 회비조차 내지않고 밥만 먹고 가는 얌체 동창도 몇몇은 있게 마련이다.

즐거움만이 아니라 보람을 나누는 동창회

초등학교 동창회가 활성화되면서 모임의 성격도 진화하고 있다. 그저 수다떨고, 밥먹고, 술마시고, 노래방가는 것이 아니라 톡톡 튀는 독특한 모임을 연출하거나 후배들이나 지역발전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는 등으로 변화하고 있다. 또 인터넷 시대에 걸맞게 동창회 홈페이지를 만들어 서로 소식을 전하고 초등학교 시절의 사진을 다투어 올리기도 한다.

과거 컴맹이었던 중년층들이 이젠 인터넷의 주역으로 부상하면서 매일 동창회 홈페이지에 들러 친구들의 근황을 파악하거나 글을 올리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었다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나이는 속일 수 없는지 아주 오래 전에 유행했던 낡은 유머를 올려 놓아도 "오랜만에 배꼽잡았다" 등의 댓글이 달려 확실히 '어르신들'이 노는 곳임을 알 수가 있다.

서울 강서구 화곡초등학교 6회 동창들은 학교 뒷산 이름인 까치산을 따서 '까치회'라고 이름지었다. 이들은 그저 추억담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녀 교육, 결혼 등 서로의 고민을 상담해주며 서로에게 어깨를 빌려주기도 하고, 이민간 친구를 찾아 여자 동창끼리 캐나다까지 다녀오기도 했단다. 충북 단양군 보발초등학교 동창들은 해마다 여름이면 동창 가족들이 당시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학교 운동장에서 1박2일 캠프를 한다. 이젠 쉰살 된 중년이지만 당시엔 한 학년이 한 반뿐인데다 처음으로 교사 발령을 받아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했던 선생님을 모시고 사제지정도 나눈다. 중국요리집을 하는 친구는 도마부터 그릇까지 다 가져와서 자장면이며 탕수육까지 동창과 가족들에게 서비스를 한다. 경남 하동군 가종초등학교 29회 서울지회장인 정순애씨는 4월 둘째 일요일에 고향에서 열린 동창회에 와인을 준비해 가서 벚꽃이 흐드러진 남도에서 와인파티를 했다. 해가 깊어갈수록 깊어지는 와인향처럼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진해지는 우정을 자축했다. 정씨처럼 이렇게 '테마가 있는 동창회'를 준비하는 것도 요즘의 트렌드다. 박물관이나 음악회에 부부동반해서 모이는 동창회도 인기다.

"살다보면 현실적으로 체면이라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중략) 그러기에 더불어 사는 지혜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십시일반, 동고동락, 뭐 그런 고상하고 거창한 말을 들먹이지 않아도 힘들 때 서로 돕고 기쁠 때 서로 축하할 수 있다면 힘들고 외로운 삶에 여정이 조금은 괜찮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이에 현실을 직시하며 중년으로서의 고독감과 가장으로서의 중압감을 지혜롭게 함께 나누고 우리 모두의 후세들에게 풍요롭고 정의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터전에 주춧돌을 마련하고자 한다. 나아가 우리들이 공통분모처럼 가슴에 묻고 있는 고향 발전에 일익을 도모하기 위해 외사초등학교 초등학교 제24회 동창생들이 동창회를 바탕으로 상부상조할 수 있는 '24두레'를 구성한다."

외사초등학교 동창생들은 이런 취지문을 밝히고 동창들의 경조사만이 아니라 지역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품앗이와 두레 역할을 하고 있다. 늙으면 자식보다 지팡이 하나가 더 도움이 되듯 나이들어가면서 서로가 서로의 지팡이 역할을 해주면서 고향에도 돈이나 봉사활동으로 도움을 주려는 동창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태백지역에서는 태백시내 초등학교를 같은 해에 졸업한 학교별 동창생끼리 연합동창회를 결선해 체육대회를 열어 친목도 나누고 불우이웃돕기 활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해놓은 것은 없는데 할 일은 태산 같은 나이, 거울을 보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얼굴을 발견하는 시기, 정신없이 달려왔지만 아직도 갈 길이 아득한 나이. 지치고 외로워서 쉬고 싶어도 다시 일어나기 힘들 것 같아 제대로 쉴 여유도 없는 40~50대들에게 초등학교 동창회는 고향의 약수터 역할을 한다. 갈증을 식혀주고 말없이 위로해주는…. 밍밍하지만 한없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약수터를 찾아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들은 지금은 우리를 짓누르는 삶의 고뇌가 깃털처럼 가벼웠던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동창회를 찾는다. 서로의 얼굴에서 주름살을 발견하고 안쓰러워하면서도 같이 손잡고 늙어갈 친구가 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하면서….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가/ 30년 만에 소집된 얼굴들을 만나니 그 낯짝 속에/ 근대사의 주름이 옹기종기 박혀있다/ 좀이 먹은 제몫의 세월 한 접시씩 받아놓고/ 다들 무거운 침묵에 접어들었다/ 화물차기사, 보험설계사, 동사무소 직원, 카센터 주인, 죽은 놈/ 만만찮은 인생실력들이지만 자본의 변두리에서/ 잡역부 노릇하다 한생을 철거하기에/ 지장이 없이 없는 배역 하나씩 떠맡고 있다/ 찻집은 문을 닫았고 바다도 묵언에 든 시간/ 뒷걸음치듯 몇몇은 강문에서 경포대까지/ 반생을 몇걸음으로 요약하며 걸었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었던 간밤의/ 풍경들이 또한 피안처럼 멀어라. (박세현 시인의 시 '너무 많이 속고 살았어')

〈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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