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남 "변신은 행복, 또 다른 나를 꿈꾼다"

2008. 5. 1.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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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장영남

드라마로 영화로 무대로 종횡무진이번엔 연극 '포트' 여주인공 맡아11살 꼬마~24살 이혼녀 변신 도전

아무리 뜯어보아도 평범한 얼굴이다. 굳이 특징을 꼽는다면 서른다섯의 적지 않는 나이에 견주어 청순한 동안과 겁먹은 듯한 커다란 눈, 그리고 가냘픈 몸매와 수줍으면서도 나직한 목소리 정도. 저런 순정만화 여주인공 같은 캐릭터에서 천의 얼굴이 나올까? 영화 <아는 여자>의 교통사고 당하는 '사고녀', <박수칠 때 떠나라>의 똑 소리 나는 여검사, <거룩한 계보>의 억척스런 여인, 연극 <서툰 사람들>의 맹한 여교사, <헨젤과 그레텔>의 섬뜩한 공포에 찬 수정, 텔레비전 드라마 <달자의 봄>의 엽기적인 아내, <아빠 셋 엄마 하나>의 편집증적 성격의 노처녀 만화 편집장 등 셀 수 없이 변화무쌍한 캐릭터로 변신한다.

장영남(35). 몇해 전부터 대학로 연극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섭외 1순위 여배우다. 그는 지난해 초 연극 <경숙이, 경숙아버지>에서 딸 경숙이, <친정엄마>에서 딸 주희 역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장진 감독 작품에 늘 출연하는 '장진 사단'의 홍일점 여배우로도 유명한 그는 장 감독이 연출한 <서툰 사람들>(2007년 12월7일~지난 3월16일)의 주인공을 맡아 대학로 최대 연극축제 '연극열전2'의 대박 행진에 물꼬를 트기도 했다. 올해에도 대학로 최고 연출가로 꼽히는 박근형(극단 골목길 대표) 연출의 연극 <포트>(5월1~18일·대학로 선돌극장)에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됐고, 제1회 차범석 희곡상 수상작(김명화 작) <침향>(6월10일~28일·심재찬 연출)에도 출연제의를 받는 등 연극계로부터 끝없는 러브콜을 받고 있다.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고 있는 그를 극단 골목길 연습실에서 만났다.

"사실 저는 완성된 배우는 아니잖아요. 저는 배우라는 직업은 학교 다니는 것처럼 무대가 수업이라고 생각해요. 제 연극의 완성도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항상 부족하니까 무언가를 찾으려고 할 뿐이죠. 힘이 남아 있을 때 많이 해놓아야지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못하잖아요."

다양한 변신이 부담스럽지 않냐고 물었다. 그는 수줍게 웃으며 반문했다. "모든 배우들의 꿈이고 행복이 아닐까요?" 제 자신도 어디서 그런 모습이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무대 위에서 전혀 다른 캐릭터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할 따름이죠."

그러면서 그는 "작품을 준비할 때마다 굳이 이전의 캐릭터를 털어버리려고는 애쓰지는 않는다"고 털어놓는다. 오히려 캐릭터를 쌓아두는 편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그에게는 하나의 에너지고 자양분이 된다는 것이 14년간 무대 위에서 터득한 나름대로 연기철학이다.

"이전의 캐릭터를 버린다고 해서 제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역할을 해도 그것이 어차피 완성된 게 아닌데 거기서 보고 느꼈던 걸 조금씩 담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써먹기도 해요. 그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걸 이 작품에서 비슷한 부분이 있다면 이번에는 요렇게 해볼까 하고요."

영국의 인기 극작가 사이먼 스티븐스의 원작연극(성수정 역)의 초연 무대인 <포트>에서 그는 마치 수렁과 같은 동네 스탁포트에서 남동생 빌리와 함께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꾸려가는 여주인공 레이첼 역을 맡았다. 한 무대에서 11살 꼬마부터 폭력을 일삼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24살 이혼녀로 성장하는 숨가픈 과정은 어쩌면 항상 새로운 캐릭터를 갈구하는 그에게 걸맞은 역할일지도 모른다.

그는 "일단 무대 위에 서면 거의 퇴장이 없이 여주인공이 성장하면서 계속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달라지는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것이 어렵다"고 털어놓는다. 그의 모습에서 문득 2006년 그가 열연했던 일인극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떠오른다. 연극계에서 2001년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과 2002년 동아연극상 연기상 등 굵직한 상을 수상하면서 주목받은 여배우로 떠올랐던 그는 김지숙, 서주희 등 선배 배우에 이어 "숱한 여배우들의 도전과제로 주저없이 꼽혔지만 정작 그 어느 누구도 쉽게 넘지 못했던" 작품에 도전했다. 억눌린 여성의 성을 다양한 시점에서 표현하는 이 작품에서 그는 5살 아이부터 70살 할머니까지 1인 10역을 별도의 분장 없이 소리와 몸짓만으로 완벽하게 연기해내 연극계에서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처음에 <버자이너…> 출연제의를 받고 많이 갈등했어요. 개인적으로는 여배우가 젊은 나이에 이 작품을 한다는 것은 폭탄을 안고 불섶에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고민하다가 '배우에게 무대는 과시가 아니다'는 생각이 들어서 모험을 걸어보고 싶었어요. 오히려 그 작품이 저에게 용기를 준 것 같아요. 저는 두려움이 많고 용기가 없는 편인데 그 작품을 하고나서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배우로 뿐만 아니라 아니라 더 인간 장영남에게 새로운 용기를 준 작품이었어요."

그는 "그때는 1시간40분간 벼랑 끝에 달랑달랑 매달려있는 기분이었다"며 "여기서 떨어져서 정말 형편 없는 배우로 밑바닥까지 꼬꾸라져서 다시 한번 출발해 보려고 했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연극 연출가들과 영화 감독들이 그를 찾는 까닭을 알 듯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천의 얼굴을 가지고 역할을 소화해내는 연기력과 독한 근성 때문이겠다.

박근형 연출가는 "성실은 기본이고 인물창조가 뛰어나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도 본인이 하룻밤 사이에 연구해오는지 참 상황과 인물파악을 잘한다"고 귀띔한다. 그는 "장영남과는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와 <내 동생 머리를 누가 깎았나>에 이어 세번째 작업인데, 나서지 않으면서도 자기 몫을 다하는 배우이다. 다른 배우에게 모범이 된다"고 치켜세운다.

그런 장영남도 배우가 된 계기를 묻자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라며 깔깔거린다. 중학교 때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건널목에 걸려있는 계원예고의 주황색 스쿨버스를 보고 "내 버스랑 저 버스랑 공기가 너무 다르게 느껴져 계원예고 연극영화과를 선택했다"는 것이 이유다.

"중학교까지는 선생님께서 책을 읽어볼 사람 손들라고 하면 마음 속으로는 손을 들고 싶었지만 한번도 그러지 못했어요. 너무 내성적이었어요. 그런데 계원예고에 가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울고 웃는 연기도 하고 대사를 하면서 묘한 즐거움과 매력을 느꼈어요."

그는 서울예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대학 선배 성지루의 권유로 95년 극단 목화에 입단했다.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여주인공 줄리엣으로 캐스팅돼 한달간 연습을 하다 공연을 3주 앞두고 오태석 대표로부터 "연기를 못한다"며 잘리는 수모를 당했다. 그때 처음 자괴감 때문에 소주 반병을 먹고 뻗었다. 또 부모의 반대와 냉담한 눈초리 때문에 1년반 가량 연극을 접는 아픔도 겪었다.

"지금은 굉장히 도와주시지만 부모님이 제가 연극하는 것을 너무 싫어하셨어요. 모멸감이 느껴질 만큼 힘들었어요. 두 분이 처음 <부자유친>을 보시고 어머니는 그 뒤로도 항상 제 연극을 보러 오셨는데 아버지는 한 번도 오시지 않았어요. 제 배역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거죠. 그러다가 10년이 지나서 지난해 12월 <서툰 사람들>을 보러 오셨어요. 연극을 다 보시고는 '옛날보다는 더 어색하더라'고 하셨어요."

돈을 벌고 싶어서 옷가게 점원 생활을 시작했지만 이내 연극이 너무 그리워 견딜 수 없었다. 1년반을 버티다 다시 목화로 찾아갔다. 그는 "내가 가장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연극이었다"고 그 때를 돌이켰다.

뮤지컬에 도전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서울예대 졸업작품으로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때는 뮤지컬에 매력을 못 느꼈지만 배우들은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영역을 자꾸 넓혀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그만큼 트레이닝을 받아야 하는데 자신은 진즉에 받지 못해 지금은 뮤지컬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처지라고 수줍게 웃는다. 그러면서 "늦지는 않았지만 트레이닝을 받고 앞으로 제가 어떻게 이 시간을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기회가 주어진다면 욕심도 날 수 있겠죠"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툭 던진다.

좋아하는 캐릭터가 궁금했다.

"그 전에는 미친 역이거나 극단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좋아했었던 것 같아요. 일반 인간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이는 거. 그러면 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 같더라구요. 그 속에서 또 새롭게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요. 제가 많이 내성적이죠. 쉽게 표현하지 못해요. 물론 화가 나면 얼굴에 티는 나는데 겉으로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그런 편이 아니라 속으로 앓는 타입이죠. 그러니까 연극이 저한테는 일종의 치유라고 할까요?"

그는 개인적으로 꼭 체홉 작품을 해보고 싶다. 배우 초년 시절 <갈매기>는 꼭 하고 싶었는데 "인연이 닿지 않아서" 기회를 잡지 못했다.

"한 번도 체홉 작품을 해본 적은 없지만 너무 매력적인 것 같아요. 잘 모르겠지만 체홉 작품은 에둘러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극의 상황을 극단적으로 대사로 표현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뭔가 에둘러간다고 할지, 아니면 휘감는다는 느낌이 자꾸 들더라구요. 그래서 결국에는 이렇게 안으로 말리는 듯한 느낌 같은 거죠." 그는 "체홉은 진짜 분명한 디테일이 많이 살아 숨쉬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며 "그래서 배우들이 욕심을 내면서도 매우 어려워 한다"고 털어놓는다.

여배우로선 적지 않은 나이에 연기 하나로 인정받은 그가 선배로서 이제 출발하는 후배 배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연극은 어렵죠. 사람들이 많이 알아주는 건 아닌데. 또 연극하는데 사람들이 많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좀 어폐가 있죠?. 생각이라는 게 한끗 차이인데 어떻게 생각하면 어렵고 어떻게 생각하면 또 어렵지 안잖아요. 배우가 되고 싶으면 지독하게 힘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작품을 하면서 부딛기고 힘들고 속상해 하고 술도 먹고 울기도 하죠. 이런 것도 지독하게 경험해 봐야 좀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돌도 생돌은 쓸 게 없잖아요. 자꾸 깎고 다듬어야 괜찮아지듯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분명히 진짜 꿈이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글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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