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록'의 효시..인종불문 열광

2008. 5. 1.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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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로큰롤은 미국 대중음악의 산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미국 대중음악의 뿌리가 다국적·다민족적 문화의 토양에서 발생했다는 것 또한 기정 사실이다. 그래서 교과서적 모범답안은 그것이 유럽 백인과 아프리카 흑인의 음악적 이종교배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특히, 중남미의 전통음악이 미국 대중음악에 끼친 영향력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것을 놓친 답이다. 1880년대 미국과 유럽의 댄스홀을 휩쓸었던 쿠바 전통의 '하바네라'에서부터 이미 라틴 음악은 서구 대중의 취향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리치 발렌스는 그 중남미의 음악 전통과 로큰롤을 결합시킨 선구자였다. 열일곱 살에 데뷔하여 1년도 채 못 되는 기간을 활동했을 뿐인 그에게 "최초의 라틴 록 스타"라는 기념비적 수사가 붙은 근거다. 가난한 치카노(미국에서 태어난 멕시코계) 노동자의 후예였던 발렌스에게 '라틴'은 혈통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 정체를 지칭하는 틀이기도 했던 것이다. 최대 히트곡이었던 <도나>가 아니라, <라 밤바>를 그의 대표곡으로 꼽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히스패닉 리치 발렌스의 영혼과 심장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 밤바>는 빌보드 팝 차트에서 성공을 거둔 최초의 스페인어 노래였다. 리치 발렌스는 수백 년 동안 중남미에서 구전되던 민요에 강렬한 로큰롤 리듬과 기타 연주를 가미하여 인종 불문의 히트곡을 탄생시켰다. 주목할 것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발렌스가 스페인어를 구사할 줄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가사를 암기하면서까지 이 노래를 부른 것은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이었다. 그것을 통해 로큰롤의 어법에 새로운 가능성을 덧붙인 것은 덤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라틴 록이 60년대 후반 산타나의 등장 이전까지 거의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것은 리치 발렌스의 때이른 죽음에서 기인한다. 그는 1959년 2월 3일 사망했다.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기도 전이었다. 게다가 죽음의 성격에서조차 불운했다. 비행기에 동승했다 함께 세상을 떠난 버디 홀리의 거대한 존재감 때문이었다. 비평가 리치 운터버거가 발렌스는 "무엇보다도 버디 홀리와 함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 두 명의 록 스타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평했을 정도다.

하지만 리치 발렌스는 80년대 후반 기적적으로 부활했다. 전기영화 <라 밤바>(1987)를 통해서였다. 급증한 미국내 라틴계 인구의 시장성을 간파한 영화사의 전략과 역할 모델을 필요로 했던 히스패닉 커뮤니티의 문화운동이 조우하여 산출한 수확이었다. 허레이쇼 앨저의 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성공신화를 체현한 발렌스의 삶이 소수 이민족의 가슴속에 아메리칸 드림의 구체적 표상으로 거듭난 것이다.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했던 산타나와 로스 로보스는 물론이고, 90년대 후반 리키 마틴과 제니퍼 로페즈의 성공에까지 드리워진 발렌스의 자취다.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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