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8월 8일] 녹둔도

2008. 8. 8.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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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0년(1587년) 가을, 조선의 최북단 변방 녹둔도(鹿屯島)의 둔전 농사는 풍년이었다.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造山)만호 이순신이 병사들을 지휘해 둔전에서 추수하는 틈을 타 야인(여진족)들이 기습공격을 해왔다. 책루를 지키던 수장(戍將) 오형과 임경번 등 조선군사 11명이 전사하고 군민(軍民) 160명이 잡혀갔다.

이순신과 이경록이 반격을 가해 적 3명을 베고 50여 명을 구출해왔다. 북병사 이일은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이순신을 참수하려 했으나 조정은 백의종군해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명했다. 이순신의 첫 번째 백의종군이다.

▦ 이듬해 1월 이일은 병사 2,500명을 거느리고 야인들의 본거지를 급습해 380명을 베고 말 9마리와 소 20마리를 빼앗는 승리를 거뒀다. 이순신도 이때 공을 세워 죄를 사면 받았다. 선조 16년 순찰사 정언신의 건의로 설치됐던 녹둔도 둔전은 이 일로 폐지됐지만 조선 백성들의 경작은 계속됐다. 녹둔도는 지금은 연해주 쪽 육지에 붙어 있으나 당시에는 두만강 가운데의 섬으로 경흥부에 속했다. 세종의 육진(六鎭) 개척 이후 여진족의 약탈을 막기 위해 섬 안에 토성과 목책을 쌓아 방비했고, 백성들은 농사철에만 건너가 경작을 했다.

▦ 물이 깊어 야인들도 잘 건너오지 못했던 녹둔도가 연해주에 붙은 것은 토사가 밀려온 탓이다. 그러나 녹둔도는 여전히 조선 백성이 거주한 조선의 영토였고,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도 있었다. 400여년 간 조선의 군민이 피로 지킨 이 섬이 러시아땅이 된 계기는 1860년(철종 11년) 청과 제정러시아가 체결한 베이징조약.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청나라는 연해주를 러시아에 넘겨줘 천추의 한을 자초했다. 이 와중에 조선땅 녹둔도까지 딸려 넘어가 버렸다. 조선조정은 1889년(고종 26년)에야 이를 알고 청나라에 항의했으나 이미 늦었다.

▦ 북한은 구 소련과 국경협정(1985), 국경설정 의정서(1990)를 체결하면서 두만강 중심선을 경계로 합의했다. 당시 녹둔도 문제를 제기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런데, 북한과 러시아가 최근 두만강 하구의 국경선을 다시 긋기 위한 협상에 착수했다는 보도다. 두만강 범람에 의한 침식 등 하구 지형 변화에 따라 국경을 재조정하려는 것으로, 녹둔도 영유권을 재론할지는 불투명하다. 지난달 러시아는 1929년 소련으로 넘어갔던 헤이룽강의 2개 섬을 중국에 반환했다. 서울 여의도의 4배나 되는 우리 땅 녹둔도도 이제 돌려 받아야 한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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