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세계일보

통계로 본 '대한민국 60년 경제·사회 변화'

입력 2008. 08. 14. 19:39 수정 2008. 08. 14. 21:05

기사 도구 모음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1982년 현대 포니 수출. ◇1980년대 포니자동차 생산 공장 전경(1984)

통계청은 14일 정부수립 60주년을 맞아 '통계로 본 대한민국 60년의 경제·사회상 변화' 자료집을 펴냈다. 국토, 인구, 국민계정, 노동, 물가, 국제수지, 교육, 사회 등 분야로 나눠 대한민국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다각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다. 건국 후 60년간 우리나라의 급속한 변천과 발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를 모아 요약 정리했다.

◇전북 남원에서 활동 중인 장티푸스 방역반의 모습(1961).◇가족계획 전국대회(1963)

78년 전화 한 대, 아파트 1채값 같아

◆귀하고 값 비쌌던 유선전화=1955년 우리나라 전화 가입자는 3만9000명으로 인구 1000명당 2대꼴이었다. 장·차관이나 검찰간부, 국회의원 정도나 쓸 수 있었고, 일반 서민은 꿈도 꾸지 못할 '재산목록 1호'였다. 1978년 전화 한 대 가격이 260만원까지 치솟을 당시 서울시내 50평짜리 집값이 230만원 안팎이었을 정도다.

전화값 거품은 1978년 전자식 교환기를 들여오면서 꺼지기 시작했다. 이어 1986년 우리나라가 디지털식 전자교환기 기술을 개발하면서 전화는 특권층의 전유물에서 서민의 통신수단으로 거듭났다. 1988년 가입자가 1000만명을 넘어섰고 1997년 2000만명, 2007년 2313만명으로 늘어났다.

1982년 한국통신공사(현 KT)에서 떨어져 나온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 SKT)가 무선호출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삐삐'의 시대가 열렸고, 가입자 수가 1997년 1519만4821명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삐삐의 시대는 무선전화의 보편화에 밀려났다. 1984년 카폰이 상용화됐을 때 가입자는 2658명에 불과했으나 2008년 1월 현재 휴대전화 가입자는 4374만5450명에 달한다.

서울 온도 3.4℃ 상승… 한강 얼음 실종

◆더워진 한반도=50, 60년 전쯤 겨울이면 서울 시민들은 한강에 나가 얼음을 잘라서 용산의 서빙고 등에 보관했다가 여름에 내다팔곤 했다. 1970년대엔 빙상대회가 한강의 얼음 위에서 열리곤 했다.

하지만 근래에 한강은 얼음을 잃어 버렸다. 1월 초에야 겨우 살얼음을 볼 수 있을 뿐이며, 4월이면 반소매 티셔츠가 더 자연스러워졌다. 지구 온난화에 따라 한반도가 더워졌기 때문이다.

서울 기온은 기상관측이 시작된 1908년 이후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2000년대 1월 평균기온(영하1.5℃)은 1910년대에 비해선 3.4℃, 1970년대에 비해선 1.1℃ 올랐다.

6월 평균기온도 23.2℃로 1910년대에 비해 약 2.4℃, 최고기온(27.7℃)도 1910년대보다 1.1℃ 높아졌다. 최저기온이 20℃ 이상 일수는 1910년대 47.4일에서 2000년대 66.2일로 18.8일이 늘었다.

지난 80년간 개나리와 진달래의 개화일은 20일 정도 앞당겨졌다. 사과는 대구·경북을 넘어 강원 영월과 양구에서, 제주 특산물이었던 한라봉은 경남 거제, 전남 고흥에서 열린다.

광복 직후 타이피스트 '최고 인기'

◆1940년대는 고물상도 인기 직업=1945년 광복 직후에는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타이피스트가 최고 인기를 누렸다. 고물상이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광산 개발업자도 주목받았다.

1950년대는 전차 운전사, 전화교환원, 라디오 조립원, 공장노동자 등이 유망 직종이었다.

1960년대는 엔지니어나 섬유·합판·신발 분야의 기능공이 각광받았고, 여공이 서민층 여성의 대표적인 직업이 됐다.

1970년대는 해외 주재원으로 나갈 수 있고 월급이 많은 종합상사 직원과 항공 승무원이 젊은 남녀의 인기직종이었다.

1980년대는 삶의 여유가 생기면서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증권·금융업이 성장하면서 펀드매니저와 외환딜러 등이 선호직종으로 부상했다.

1990년대는 IT가 발달하면서 프로그래머와 벤처 기업가가 각광받았다.

자가용 1600만대… 52년 만에 913배↑

◆마이카 시대='오라∼잇'. 손님을 다 태운 뒤 버스 옆구리를 탕탕 치며 한마디한다. 매일 출퇴근 시간 서민과 부대낀 시내버스의 마스코트인 '안내양'에 대한 기억이다. 안내양은 하루 18시간씩 일해야 했고, 숙소도 변변치 않은 등 생활은 고달펐다고 한다. 그들은 1961년 1만2560명이었으며, 1971년엔 3만3천504명에 달했다.

1970년대 중반 5만명에 육박했던 안내양은 1982년 9월10일 시민자율버스가 등장하면서 줄기 시작했다. 하나뿐이던 시내버스 문이 두 개로 늘고, 앞문으로 타면서 요금을 내기 시작했다.

1955년 자동차 등록대수는 1만8000대로 자동차는 사람보다 화물 운송에 주로 활용됐다. 자동차 중 화물차의 비중이 50%가 넘었고, 승용차는 6600대에 불과했다.

1962년 새나라자동차가 나오면서 승용차 보급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으며, 같은 해부터 국산차가 본격 등장했다.

1970년대 후반 오일쇼크 이후 주춤하던 자동차 보급은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급속도로 이뤄지면서 2007년 1642만8000대로 52년 만에 913배가 됐다.

60년대까지 자연광물 내다팔아

◆오줌에서 반도체까지="여러분의 오줌은 귀중한 외화를 벌어들입니다." 1970년대 공중화장실에 붙었던 안내문이다. 오줌에서 추출하는 유로키나제를 1㎏당 2000달러에 중풍 치료제로 수출했던 것이다.

1960년 초에는 자연광물이 주요 수출품이었으나, 60년대 중반 수출 드라이브 정책 이후에는 수출품목이 확 바뀌었다.

광물과 수산물은 자취를 감췄고, 공산품이 그 자리를 메웠다. 1970년대 주력 수출품 중 하나는 가발이었다. 엿장수는 리어카를 끌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부녀자의 머리카락을 수집했다.

그래서 부모 약값 때문에, 동생 월사금을 대느라, 남편 술값으로 머리카락을 잘라 판 여인의 이야기는 드라마의 단골 소재였다

이후 수출품은 우리의 산업구조 발전과 함께 변화를 거듭했다. 1970년대 섬유, 1980년대 철강판과 선박, 1990년대 반도체, 자동차 등으로 급속히 규모가 커지고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으로 바뀌었다.

2000년 이후 한국의 주력 수출품엔 큰 변화가 없다. 반도체, 자동차, 석유제품, 선박, 휴대전화, 철강이 선두그룹을 유지하고 있다.

김용출·우상규 기자

kimgija@segye.com

ⓒ 세계일보&세계닷컴(www.segye.com),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세계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