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은 살아 있다]개발 경제의 상징..NGO로 변신 - 굴곡 많았던 38년 역사

2008. 8. 29.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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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그해 여름 수해를 당한 경상도 일원의 피해 지역을 돌아보던 중 청도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었다. 청도는 다른 지역과 달랐다. 수해 복구는 물론 길이 넓혀져 있었고 가옥들의 지붕은 개량형으로 바뀌어 있었다. 똑같이 수해를 당했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놀랍도록 환경이 개선돼 있었던 것이다. 이유를 묻자 지역 주민들은 "이왕 복구하는 거 제대로 하자고 주민들이 결의해 협동했다"고 답했다. 이 일은 이듬해 새마을운동이 공식화되는 계기가 됐다.

1970년 4월 22일 부산. 박 전 대통령은 한해(寒害) 극복을 위해 전국의 지방 장관이 모인 자리에서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실시할 것을 주문했다. 청도군처럼 주민들의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을 통해 농촌지역을 발전시켜 보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전국 3만5000여 곳의 농어촌 마을에 한 마을당 335포대의 시멘트를 지급하며 생활 환경 개선 활동을 독려해 나갔다.

마을 간 경쟁 촉발로 급속 확산

새마을운동은 처음부터 관 주도의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잘 살아보자'는 신념으로 뭉친 통치자의 철학에서 비롯됐고 새마을운동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각별한 애정을 통해 확산됐다.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가 숨진 날, 시신을 안치한 관 앞에서 대성통곡 한 후 곁에 있던 당시 김종필 총리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 "총리, 내일 국회의원들 새마을 교육 가는 거지?"였을 정도로 새마을운동은 박 전 대통령의 '혼'과도 같은 것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공을 들인 배경엔 당시의 경제 상황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개발 경제로 도시민의 생활은 나아지고 있었지만 농촌의 상황은 그야말로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도시 이주로 농촌 인구가 줄면서 식량 자급도는 떨어지고 도농 간의 격차는 벌어지고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에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능 키'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최고 통치자의 강한 의지 하에서 새마을운동은 그야말로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한 마을의 성과가 이웃 마을로 전파됐고 삽시간에 전국의 농어촌에 새마을의 물결이 출렁였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새마을운동이 전파된 것은 물론 '성과'였다. 새마을운동이 도입된 마을은 여지없이 이전에 비해 잘 살게 된 것이다.

정부의 전략도 효과적이었다. 정신 교육과 경쟁이라는 두 가지 축이 큰 힘을 발휘했다. 지도자가 있는 마을의 성과가 더 뛰어나다는 분석 결과에 따라 새마을연수원을 짓고 수많은 새마을 지도자를 양성했다. 이들은 곧 전국으로 흩어져 새마을운동의 전도사가 됐다. 이들의 성공 사례 발표는 전폭적인 호응을 얻으며 새마을운동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를 했다. '잘 살아보겠다'는 의욕이 없는 사람을 지원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은 박 전 대통령의 신념이기도 했다.

마을마다 차등 지원을 실시해 마을 간의 경쟁을 유발시킨 것도 효과적이었다. 전기를 보급할 때도 전봇대에 가까운 마을이 아니라 새마을운동에서 보다 나은 성과를 기록한 마을이 우선이었다. 이를 통해 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낸 것이다. 재원이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차등 지원 정책은 정부 입장에서도 최선의 방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새마을운동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1967년 농촌 가구의 평균 소득은 도시 가구의 60% 정도였지만 1974년엔 오히려 농촌의 소득이 도시를 앞질렀다. 농촌의 성공은 도시를 자극했다. 새마을운동은 농어촌을 넘어 도시로 급속히 확산됐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부작용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관 주도의 운동이 갖는 태생적 한계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 성과에 따른 지원을 하니 실적을 과장하는 허위 보고가 빈번해졌다. 이에 따라 마을 간의 갈등이 촉발되기도 했다.

저개발국 발전의 '도우미'

박 전 대통령의 서거 후 존폐의 기로에 직면했던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는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이름을 바꾸고 정부 기구에서 민간 기구로 변신을 시도하며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시기에 새마을운동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췄지만 추진 주체가 민간으로 이동하면서 운동의 활력은 예전만 못했다.

민간 기구로 전환했다지만 '관제'의 옷을 완전히 벗는 데는 실패했다. 정부의 지원은 여전히 막대했고 5공화국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활용되는 측면이 강했다. 특히 4대 회장인 전경환 씨의 비리는 새마을운동의 위상을 땅에 떨어뜨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 전 회장은 1989년 횡령, 이권 개입, 탈세 등의 혐의로 징역 7년, 벌금 22억 원을 선고받았다. 석방 후에도 사기 등 범죄 혐의로 수배를 받는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지탄을 받고 있다.

새마을운동은 1990년대에 다시 한 번 변화를 모색했다. 우선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새마을운동중앙회로 이름을 바꾸고 관변 단체 색깔을 지우고 순수 민간단체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개방과 지방 자치라는 당대의 화두에 걸맞게 운동의 성격에도 변화를 시도했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금모으기운동, 국민저축운동 등을 통해 국민적 여론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1998년엔 '제2의 새마을운동'을 선언,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을 추구하기로 결정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비정부기구(NGO)로서의 위상이 다져지고 있다. 2000년 유엔이 인정하는 NGO가 된 새마을운동중앙회는 저개발 국가에 새마을운동을 전파, 지역 사회 개발에 기여하고 있다.

돋보기│새마을운동중앙회 역대 회장

관료 출신 '즐비'…최근 18대 회장 취임

새마을운동중앙회의 역대 회장들은 대부분 관료 출신이지만 시민 운동 지도자나 정치인 출신도 있었다. 올해 이의근 18대 회장이 취임했다.

초대 회장인 김준 전 새마을지도자연수원장은 1, 2, 6대 회장을 역임했다. 김 전 회장은 새마을운동에 관한 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1972년 초대 새마을지도연수원장을 맡으며 새마을지도자 양성을 주도하며 새마을운동 보급의 최일선을 지휘했다.

7, 8, 9, 13대 회장을 지낸 김수학 전 회장은 비리 사건으로 국민적 지탄을 받게 된 중앙회를 재건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특히 13대 회장 시절엔 금모으기운동, 숨은자원모으기운동, 국민저축운동 등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전 국민적 운동을 벌여 큰 반향을 이끌어냈다.

저명한 시민 운동 지도자였던 강문규 14, 15대 회장은 중앙회를 NGO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러시아 베트남과 새마을 협력 사업을 추진했고 민간사회안전망범국민운동협의회의 결성을 이끌었다. 거물급 정치인인 이수성 16, 17대 회장은 새마을운동의 국제화에 기여했다. 이 시기에 중앙회의 국제화 사업은 중국 동남아 몽골 아프리카 등으로 크게 확장됐다.

지난 5월 취임한 이의근 18대 회장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4번에 걸친 경북도시사 시절 전국에서 유일하게 도·시·군에 새마을과를 존속시켰을 정도였다. 새마을운동이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알려졌다.

변형주 기자 hjb@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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