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학생회 선거 판도 촛불이 바꿔놓았다

고재열 기자 scoop@sisain.co.kr 2008. 12. 1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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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공감대' '소통' '함께' '변화' '바꿔야 한다' '체인지' '리얼리스트' 올해 대학 총학생회 선거 구호에 등장한 단어들이다. 11월 말과 12월 초 2주간에 걸쳐 전국 주요 대학 총학생회 선거가 치러졌다. 올해도 대학 총학생회 선거를 관통하는 '대세'는 무관심이었다. 그런데 이런 대세의 곁가지로 흥미로운 '소세'가 나타났다.

'소세'는 크게 네 가지로 나타났다. 그동안 대학 총학생회 선거의 주된 흐름이었던 운동권 반감 정서가 옅어지고 오히려 운동권 총학생회가 부활하는 양상이 나타났다는 것이 첫 번째 변화이다. 올해 대학 총학생회 선거는 '촛불 후보'가 당선한 국민대 선거로 시작해서 촛불집회까지 참석한 비운동권 후보를 제치고 정통 운동권 후보가 당선된 고려대 선거로 끝이 났다. 이 외에도 한국외대 충남대 울산대 등 몇 년째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꾸려지던 곳에 새롭게 운동권 총학생회가 꾸려졌다.

'비운동권 후보의 운동권화'도 또 하나의 변화였다.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등에서 비운동권 총학을 계승하는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그동안의 활동 내역과 공약 내용을 뜯어보면 사실상 운동권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 등장과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총학생회의 리더십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며 나타난 현상이다.

또 다른 변화는 '뉴라이트의 몰락'이 대학 사회에서도 확인된다는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의 이데올로그였던 뉴라이트 세력은 그 주축이 청와대와 한나라당 등 정치권으로 진입하면서 단순한 정치 예비군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대학 사회에서는 뉴라이트에 대한 비판이 더 가파르게 진행되어서 총학생회 선거 후보의 뉴라이트 경력이 폭로 대상이 되는 등 '뉴라이트 혐오증'이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마지막 변화는 학생들이 나름 적극적으로 선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변화의 폭이 크지는 않다. 겨우 연장 투표를 면하거나 하더라도 여유 있게 할 만큼 참여가 늘어난 정도다. 하지만 학교 커뮤니티에 의견을 개진하거나 개인 이름으로 대자보를 붙이며 의견을 적극 표명하는 학생이 늘어났다.

이런 네 가지 변화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운동권의 부활'이었다. 그 서막을 알린 곳은 국민대 총학생회 선거였다. 이전 국민대 총학생회는 촛불에 비판적이었다. 이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었고 촛불집회 당시 책상을 들고 나와 촛불을 켜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던 '촛불 대학생' 김동환 후보가 당선했다. '반촛불 총학생회'에 대한 일종의 심판 선거가 이뤄진 셈이다.

울산대 운동권 후보 당선이 최대 이변

오랜만에 운동권 후보가 당선한 국민대 울산대 충남대 한국외대 중에서 가장 관심을 모은 곳은 울산대 총학생회 선거였다. 평균 소득 4만 달러 도시에서, 한나라당 정몽준 최고위원이 이사장으로 있는 대학에서 운동권 후보가 당선한 것은 이변으로 받아들여졌다. 울산광역시의 유일한 종합대학이기 때문에 울산대 운동권이나 비운동권 세력 모두 기존 정치세력과 교류하고 있다. 따라서 울산대 총학생회 선거 결과는 한나라당 등 여권에 대한 울산 정서의 변화를 읽는 가늠자로 보인다.

'운동권의 몰락'이라는 대세를 뒤엎고 운동권 총학생회가 부활할 수 있었던 '비결'은 비운동권 총학생회의 부패에 대한 학생들의 실망감이 컸다는 데 있다. '무능한 운동권 학생회' 대신 뽑아주었더니 '부패한 비운동권 학생회'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학교와 협잡하면서 총학생회 간부들이 잇속만 챙기고 기업체 협찬을 끌어들여 총학생회의 배만 불렸다는 불만이 팽배하면서 총학생회의 '도덕성'에 대한 요구 수준이 높아진 것이다.

두 번째 변화인 '비운동권 총학생회의 운동권화'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이른바 명문대학에서 나타나는 양상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이들 대학은 1990년대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먼저 등장한 곳이기도 하다. 이들 대학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활발하게 '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곳이 고려대 총학생회다. 촛불집회 때 고려대 총학생회는 학생들과 함께 학교 깃발을 들고 나갔다가 총학생회장과 부총학생회장이 모두 경찰에 연행되는 고초를 겪었다. 올해 총학생회 선거에 후보를 내면서 심지어 선거 공청회에서 '이명박 정부와 싸우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서울대와 연세대 총학생회도 비운동권이었지만 고려대 총학생회처럼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서강대 총학생회는 총학생회 깃발을 들고 나가지 않는 대신 총학생회 간부들이 집단으로 참여했고, 학내 단체가 한겨레신문에 촛불집회 지지 광고를 낼 때 광고비를 지원해주는 방식으로 도왔다. 비운동권 총학생회 대학끼리 연대해서 다양한 사회참여 행위를 하고 있기도 하다. 비운동권 총학생회를 계승해 올해 서강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서유미씨는 "지난 총학이 대중성은 확보했지만 뚜렷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올해는 직접 행동을 더 해서 결과를 만들어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등록금 투쟁 등 학내 투쟁도 하고 촛불집회 등 사회참여도 하는 비운동권 총학생회와 기존 운동권의 유일한 차이는 '족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NL(민족민주 계열)이니 PD(민중민주 계열)니 하는 운동권 '족보'에 속해 있지 않은 이들은 스스로 시조가 되어 새로운 '족보'를 만들었다.

비운동권이라는 말 대신 이들 총학생회는 '건전한 비권(고려대)' '활동권(서울대)' '학생권(연세대)' '학우 중심 학생회(서강대)'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고려대 김도년씨는 "대학사회에 여전히 비운동권이라는 상징성이 크다. 그래서 일종의 '여당 프리미엄'을 갖기 위해 비운동권은 고수하면서도 그때그때 현안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운동권 세력도 인정해줄 정도로 이들은 섬세한 정치력을 선보인다. '다함께' 소속인 명지대 박용석씨는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소수 여당인 비운동권 총학생회 대 다수 야당인 운동권 단과대학생회' 구도에 적응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분석된다"라고 말했다. 학생운동 단체인 '살맛'에서 활동하는 연세대학교 최하얀씨는 "비운동권 총학생회의 의제 설정 능력이 탁월했다.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제시한 의제에 운동권 단체들이 끌려다니는 형국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이렇게 정치 보폭을 넓혀가는 동안 수세에 몰린 운동권 세력은 더욱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 총학생회 선거운동을 할 때도 운동권에 대한 반감을 너무 크게 의식해서 활동 경력을 숨기고 노선과 공약을 선명하게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운동권 세력의 행태에 대해 이화여대 강정주 전 총학생회장은 "과거를 숨기고 공약을 뒤로 빼고, 그렇게 해서는 답이 없다. 운동권이 왜 필요한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 성균관대 등 이전에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대학의 운동권 세력은 총학생회도 구성하지 못하고, 주장도 선명하게 펼치지 못하면서 운동권 주류에서 멀어졌다. 이들 학교를 대신해서 최근 떠오른 학교가 성공회대다. 올해 성공회대 총학생회장이 된 박명희씨는 "우리는 명확하다. 반이명박, 신자유주의 철폐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치력 외에 운동권 총학생회가 비운동권 총학생회에 밀리는 부분은 바로 사업 능력이다. 비운동권 총학생회는 그때그때 필요한 사업, 이른바 '달력투쟁'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총학생회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인 연세대 대학원의 김신식씨는 "학생들은 CEO형 리더십을 원한다. 내가 낸 등록금이 나에게 혜택이 돌아오게 하는 방향으로 총학생회의 활동이 이뤄지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연세대 비운동권 총학생회의 경우 이런 '달력투쟁'에 몰입한 덕분에 <연세춘추> 조사 결과 80% 넘는 학생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와 고려대의 비운동권 총학생회도 학생회 활동의 진정성을 인정받아서 학생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서울대 '선거뉴스'팀에서 활동한 박은하씨는 "이번에 출마한 후보 중에서 학생회에 대해 가장 진지한 고민을 하는 후보는 비운동권 후보였다"라고 평가했다. 본관 점거 때문에 출교 처분을 받을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고려대 강영만씨는 "비운동권 총학생회도 운동권 못지않게 활동을 열심히 했다. 그리 차이가 없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비운동권 총학생회도 이제 매년 자신들을 계승하는 총학생회 후보를 당선시켜 노선을 계속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족보'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연세대에는 '36.5도'라는 이름으로, 고려대에서는 '공감대'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이들 비운동권 학생회는 안정적 세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단과대 학생회 진출도 꾀한다.

운동권은 분열로 정치력 발휘 못해

비운동권 학생회가 이렇게 진화하는 동안 운동권 진영은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그 근본 원인은 분열이었다. NL 계열과 PD 계열이 분리된 것 말고도 NL 계열 안에서도 한총련 계열과 한대련 계열 등으로 분리되어 있고, PD 계열 내부도 여러 계열로 나뉘었다. 이들과 별개로 '다함께' '진보신당 학생위원회(살맛)' '사회당 학생위원회(대학생 사람연대)' 등으로 운동권 세력이 세분화되었다.

운동권 세력의 두드러진 특징은 연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연합하지 못하는 것은 증오와 불신이다. 그리고 서로 '족보'를 따지기 때문이다. 이번 총학생회 선거에서도 이런 양상이 극명히 나타났다. 서울대에서는 민노당학생위원회 계열, 6·15연석회의 계열, 행진 계열, 학생사회주의정치연대 계열에서 모두 후보를 내서 단독 출마한 비운동권 후보에게 완패했다.

다른 학교도 사정은 비슷하다. 연세대에서는 분열된 운동권이 연합 후보를 내지 못해 연세대 역사상 최초로 운동권 후보가 출마조차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성균관대에서는 단독 후보로 출마한 비운동권 후보에게 문제가 생겨 재선거가 실시되는데도 운동권 후보를 못 내고 있다. 성균관대 한 단과대 학생회장은 "운동권이 8년간 야당 생활을 했다. 이번에 기회가 왔다. 이런 조건에서도 연합 후보를 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운동권의 한계다"라고 말했다.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운동권으로 진화하는 것과 궤를 같이해서 나타나는 현상은 대학가에 '뉴라이트 혐오증'이 팽배해진다는 사실이다. 이는 총학생회 선거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뉴라이트 관련 단체에서 활동했던 후보는 그런 경력을 숨기기 급급해하고 상대 후보 진영에서는 뉴라이트와 관련해 조금의 빌미라도 보이면 연관 여부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요즘 대학 총학생회 선거의 특징은 막판에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네거티브 선거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때 운동권 후보 측에서 비운동권 후보를 공격하는 포인트가 바로 뉴라이트와의 연관성이다. 매년 방학 때마다 대학생 캠프를 열고 대학생 조직을 지원해서 세력 확장을 꾀했던 뉴라이트 세력에게는 뼈아픈 부분이지만, 이미 뉴라이트에 대한 반감은 기존 운동권의 반감을 능가할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다.

대학 총학생회 선거에서 나타난 마지막 특징은 참여가 늘었다는 것이다. 양적인 참여보다는 질적인 참여가 늘었다. 대학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을 통해서 혹은 대자보를 붙이는 방식을 통해서 적극 개입하는 학생이 많아졌다는 것이 올해 총학생회 선거의 두드러진 변화이다. 특히 개인 이름으로 대자보를 붙여 총학생회 후보의 공약이나 선관위의 선거 관리 행태를 비난하는 학생이 많았다. 촛불정국을 거치면서 의사표현이 좀더 적극적으로 변한 것으로 보였다.

올해 고려대 문과대 학생회 선거 캠프에 참여했던 김준호씨는 "학생들이 말하는 것은 '우리를 가르치려 하지 말고 우리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올해 서울대 총학생회 평가에서 가장 잘한 일은 '촛불집회에 총학생회가 참가한 일'로 꼽혔지만 가장 잘못한 일로는 '촛불집회 참가하는 데 학우들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은 일'이 꼽혔다. 소통은 이명박 대통령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재열 기자 /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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