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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57> 언제나그모습-가수 김상희

입력 2009. 05. 05. 14:14 수정 2009. 05. 05.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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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대학 1학년때 KBS신인가수에 선발 연예계 첫발얼마안가 그만둔후 "MC 해보지" 내 제의 수락 왕성한 활동칠순 가까웠어도 사회봉사등 변함없는 모습 늘 보기좋아

20대 초반에 만났을 때나 60대 후반이 되고 곧 칠순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나 그냥 그 모습으로 있는 여인이 있을까? 있다. 가수 김상희를 표현하려면 그 수밖에 없다.

"오빠, 히히히" 김상희다. 도무지 걱정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히히히'하고 웃는 모습이 4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그건 무척 반갑다는 표시다. 그는 나를 오빠라고 부른다.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가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진짜로 오빠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번도 '김상희씨'라고 부른 적이 없다. 그냥 '순강아'라고 부른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 그렇게 나이가 들었어도 그대로 부른다. '순강'이는 그의 본명이다. '최순강(崔純江)이다. 그대로 직역하면 "순수한 강물"이다.

고려대학교 법학과 1학년 때 그러니까 1961년도에, 가수 해보겠다고 KBS가 뽑는 신인가수 선발대회에 나가서 당당히 합격했다.

그런데 얼마동안 가수 한다고 왔다 갔다 하더니 별로 재미가 없었는지, 아니면 학교에 미안 했는지 집어 치우고 쉬고 있는 '순강'이를 내가 불러냈다. "가수 그만두고 전문 MC를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한 것이다. 1964년인가, 65년인가, 그 무렵이다.

나는 한국일보 자매지 '주간한국'의 기자로서 이른바 '연예기자 1호'라는 칭호를 가지고 정신없이 뛰고 있을 때였다. 젊은이들의 고향인 '세시봉'에서 만나자고 전화를 했더니 얼마 후 키가 커다란 김상희가 직경 60cm는 되는 둥그런 멋쟁이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아래위로 까만 정장을 입었는데 나는 속으로 "이 친구 끼가 대단하겠는데"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편이었다.

내가 그를 부른 이유는 서울 퇴계로2가에 있는 오리엔탈 호텔 2층에 '엘 파소'라는 음악 살롱에서 MC로 추천하기 위해서 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곳이 그 무렵 우리나라의 대중문화 허브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저녁에는 한국 최고 악단들이 출연해서 연주를 하는 나이트클럽이지만 낮에는 5시간정도 음악 살롱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위로 해주던 곳이다. 가수들의 노래도 있고 소설가, 시인, 음악인, 미술인 등 문화인들이 와서 자연스럽게 특강도 하고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면 객석에 있는 사람들이 질문도 하고 의견을 교환 하는 그런 곳이었다.

19, 20세기 프랑스의 살롱과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이 살롱을 운영하는 총 책임자 역할을 했는데 김상희 외에도 아나운서 임택근씨 등을 비롯한 사회의 저명 인사들이 참석을 하기도 했다.

김상희는 가수생활 보다 이런 분위기의 사회자 역할을 즐겼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수활동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 때 활동한 MC경력이 지금까지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능력의 초석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가수를 시작한 것은 풍문여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간 첫 해인데 작곡가 손석우씨가 만들어 준 '삼오야 밝은 달'이란 노래가 공식적으로 데뷔곡인 셈이다. 그리곤 엄청나게 많은 노래를 취입한다.

배고픈 사람 곱빼기 밥 먹듯이 많은 노래를 부른다. <처음 데이트>(작곡가 손석우), <울산 큰애기>(나화랑), <경상도 청년>(전오승), <대머리 총각>(정민섭),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김강섭), <단벌신사>(정민섭), <빗속의 연가>(이철혁), <빨간 선인장>(김강섭), ,어떻게 해>(신중현) 등등 그는 왕성한 활동을 한다.

60년대 후반에 그는 큰 기회를 잡는다. <살짜기 옵서예>라는 대작 뮤지컬의 주역을 맡게 된 것이다. 이 뮤지컬은 66년에 초연을 했는데 초연 주역은 패티김이 맡아서 대 성공을 거뒀다. 그 후 2대 주인공 '애랑'역이 김상희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 뮤지컬의 연출자인 임영웅씨가 김상희를 낙점하고 나한테 섭외를 부탁해 왔다. 나는 즉시 김상희를 만나서 '뒤 책임은 내가 알아서 질 테니 무조건 맡아라'라고 말했고, 그는 내 말만 믿고 무조건 맡았다. 그리고 공연은 대 성공으로 끝났다.

그러던 어느 날 KBS PD를 하고 있는 후배 유훈근이 나를 찾아 왔다. 김상희를 정식으로 소개 시켜달라는 것이다. '방송국 PD인 자네가 직접 연락을 하지 왜 나한테 소개를 부탁하느냐'고 의아해 했더니 '형님이 이야기를 해야 더욱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둘을 만나게 해 주었고, 그들은 그 후 자주 만나더니 부부가 되었다.

그런데 결혼식하기 전날 해프닝이 있었다. 68년인가 69년인가, 어느 날 저녁 김상희의 어머니가 나한테 전화를 했다. 당장 빨리 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무슨 일인데요?" "급히 좀 와라, 큰 일 났다. 훈근이(김상희 신랑) 친구들이 함을 지고 왔는데 집 앞에서 도무지 들어오지 않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다."

김상희는 그 무렵 종로구 청진동에 살고 있었는데, 내가 도착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난리 법석이었다. 20여명이 함을 지고 와 길에 드러누워서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정도는 나한테 누워서 떡먹기다. 더구나 그 중 서너 명은 내가 잘 아는 후배들이었기 때문에 간단히 해결하고 함을 무사히 집안으로 모셨다.

김상희의 어머니는 나에게 '밤톨'이라는 별명을 달아 주었다. 어머니의 성함은 '차금덕'. 금년 87세인데 건강이 나빠서 김상희는 항상 걱정이다.

김상희는 가수활동도 여전하지만 30년 전부터 해 오던 사회 봉사활동을 열심히 한다. '사단법인 연예인 한마음회'가 그것이다.

매년 6월 1일에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노인들을 초대해서 많은 가수들, 코미디언 등 연예인들과 함께 무료 위문공연을 한다. 그리고 수시로 양로원이나 독거노인들을 찾아가서 위로를 한다. 송대관, 현철, 주현미, 현숙, 남궁옥분, 권성희, 박일준 등이 행사에 참석한다.

그는 1943년생이고, 손주를 둘이나 둔 할머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할머니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 본적이 없다. 그냥 유쾌한 '최순강'으로 남아 있다. 내일이라도 그녀는 나를 만나면 "오빠, 히히히"할 것이다. 나는 그런 그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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