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우유 '검은 눈물'

입력 2009. 7. 31. 15:20 수정 2009. 7. 31.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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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뉴스 쏙]

우유가 울고 있다. 잘 팔리지는 않는데 제조 비용은 늘어나고, 강력한 외국 우유들이 호시탐탐 한국 시장을 노린다고 우유업체들은 하소연한다. 인기 스타들을 동원해 우유 노래를 불러대고, 국민 건강을 위해 우유 급식을 늘리자고 호소한다.

소비자와 낙농가들은 이 눈물이 얄밉다. 우유업계가 연구 개발로 경쟁력을 높이려 하기보다는 낙농가와 소비자 사이에서 땅 짚고 헤엄치는 식으로 경영해왔기 때문이다. 원유값을 올려 달라는 낙농가의 요구를 한껏 누르고 있다가 원가를 올린 다음에는 소비자 가격도 올려 손해 없는 장사를 하는 식이다. 유통망을 장악한 기존 우유업계는 신생사의 시장 진입을 압박하고, 우유배달에 자전거 등을 경품으로 내걸며 유혈 경쟁까지 벌인다. 하지만 부가가치가 높은 치즈 등 유제품 부문에서 수입 제품에 대한 경쟁력을 높이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유통기한이 짧아 수입 제품이 들어오기 어려운 우유와 가공유에만 목을 매고 있다. 젖소 송아지 가격은 사상 최저로 폭락했고, 지갑이 얇아진 소비자들은 우유값이 부담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우유는 남아돌고, 여전히 이익을 내고 있는 우유업계는 우유를 더 마셔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1인당 우유소비 61㎏…해마다 줄어드는데제조비용 늘고 FTA 시장 개방 먹구름까지업체선 유제품 개발 등 경쟁력 강화는 뒷전우유값 넉달새 35% 인상…소비자 부담 늘려

한국에서만 더 비싼 지방 뺀 우유

우유 중에서 특히 인기가 높은 제품은 지방을 줄이거나 없앤 저지방·무지방 우유다. 일반 우유보다 값이 1.5~2배 정도지만 건강을 생각하는 소비자들이 선호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뭔가 다른 우유라고 여기며 의심 없이 구매한다. 머리를 좋게 한다거나 칼슘을 보강했다는 우유처럼 여긴다.

하지만 저지방·무지방 우유는 특정 성분을 첨가한 게 아니라 원유에 들어 있는 유지방을 뺀 우유다. 뽑아낸 유지방은 버리는 것이 아니다. 각종 크림과 버터 재료로 가공되고, 크림과 버터 역시 비싼 값으로 판다. 우유회사는 무지방 우유도 팔고 유지방도 판다. 마당 쓸고 돈 줍는 식이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일반 우유보다 저지방 우유가, 저지방 우유보다 무지방 우유가 더 싸다. 우리나라 우유업계에선 탈지공정 비용 때문에 저지방·무지방 우유가 비싸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사실은 관세가 낮은 일부 버터 대체품이 대량 수입되면서 국산 버터 등의 가격 경쟁력이 밀리자, 지방을 빼는 공정 비용을 소비자들에게 전가한 것이다.

이렇게 생산 비용 증가분을 소비자들에게 전가하는 것은 우유업계의 관행이다. 무조건 소비자 가격을 올리는 식으로 경영해왔다. 지난해 6월까지 200㎖짜리 우유의 전국 평균 시중 소비자판매가격은 464원이었지만, 같은 해 8월 520원으로 오른 데 이어, 두 달 뒤인 10월에는 628원까지 올랐다. 2008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4.7%였지만, 우유값은 불과 넉 달 사이에 35% 넘게 올랐다.

각종 유제품 경쟁력은 외국 업체들보다 크게 떨어진다. 유명 외국 업체들과 제휴하는 등으로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지만 여전히 품질이 낮다는 평가다. 팔고 남은 우유를 탈지분유로 만들어 원유 재고를 줄이는데, 탈지분유 또한 생산량이 소비량을 초과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려면 탈지분유를 재료로 쓰는 치즈 등의 유제품 생산을 늘려야 하지만, 수입 탈지분유 가격이 국산의 절반 수준이어서 이 역시 가격경쟁력이 없다.

밀크라인으로 우유 살릴 수 있을까?

우유업체들은 우유 소비 캠페인을 들고 나왔다. 김연아, 박태환 두 스포츠 스타를 광고에 기용했다. 김연아는 매일우유 광고모델로, 박태환은 우유홍보대사로 활동중이다. 유명인들이 입 주위에 우유 자국을 강조하며 웃는 광고는 미국에서 1993년 시작했다. 각종 음료수 시장이 커지면서 우유 소비가 줄자 미국 낙농업자들이 돈을 모아 '갓 밀크?'(got milk?)라는 시리즈 광고를 만들었던 것을 따라 한 광고다.

이와 함께 우유업체들은 가공유 신제품들에 주력하고 있다. 가공유 대표상품들인 초코우유·딸기맛우유·바나나맛우유에 이어, 에스프레소 커피 붐에 발맞춘 'RTD'(ready to drink) 커피음료, 웰빙 다이어트 바람에 편승한 무지방·저지방 기능성 우유, 유기농 우유 등이다. 특히 우유와 커피를 결합하는 신제품 출시를 주목하고 있다. 서울우유는 최근 일본 커피브랜드인 도토루와 업무 제휴를 맺었고, 매일유업은 커피빈코리아와 손잡고 RTD 제품을 출시하는 것을 협상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동시에 우유업계는 우유 급식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학교의 우유 급식률이 절반인 50% 정도인데, 일본은 초중등학교 급식률이 90%가 넘는다. 따라서 학교와 군 등의 우유 급식을 늘려야 한다는 논리다. 우유 급식을 늘리기 위해 바나나맛우유 등 가공유도 급식에 포함시키는 것도 우유업계의 희망사항이다. 미국 낙농업계가 2003년 이후 '학교 우유 급식을 다시 보자'는 프로그램에 300만달러를 투입해 우유 소비를 늘리는 데 성공한 것을 우유업계는 벤치마킹하고 싶어한다.

'자전거 우유' 진흙탕 싸움

국내 우유 총소비량은 2001년 300만t을 넘어선 뒤 2007년까지 꾸준히 이 수준이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지난해 300만t 아래로 내려갔다. 1인당 연간 우유 소비량으로 보면 2002년 64㎏으로 최고점을 찍은 뒤 해마다 조금씩 줄어들어 지난해 61.3㎏으로 내려갔다. 최근 5년새 흰 우유 1인당 소비량은 28㎏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초코우유나 바나나맛우유 같은 가공유 소비량이 9㎏대에서 7㎏ 정도로 급락했다. 유제품은 치즈만 소비량이 늘고 있을 뿐, 발효유는 마시는 제품을 중심으로 소비량이 줄어들고 있다.

초·중·고교 우유 급식률은 조금씩 늘긴 하지만 구조적인 한계가 있다. 2005년 48%에서 2008년 51%까지 올라섰지만 이는 참여정부에서 2005~2006년 중·고교에 무상 우유 급식을 늘린 덕분이었다. 유상급식률은 45%에서 변동이 없었다.

결국 이렇게 포화상태에 이른 상황에서 우유업계가 초점을 맞출 곳은 유제품 쪽일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실제 국내 치즈 소비량은 상당히 늘어나고 있지만 늘어나는 치즈 소비량의 80%는 수입 치즈들이 차지하고 있다. 한 낙농 전문가는 "시유(시중에 판매되는 우유) 생산에만 집중해오다가 뒤늦게 치즈 품질 높이기에 나섰지만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수입 치즈에 경쟁력에서 크게 밀리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유업계는 고품질 유제품 개발에 전력을 다하기보다는 여전히 '돈 안 되는' 우유로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다. 최근 정부가 소비자 경품 규제를 폐지하면서 '자전거 우유'까지 등장했다. 경품 규제 폐지 이전에도 우유업계는 공공연히 경품 판촉을 해왔고, 이젠 상품 가격의 10%를 초과하는 경품까지 제공하고 있다.

국경없는 우유 시대 수출로 뚫어라

한국으로 밀려오는 에프티에이(FTA) 바람은 우유업계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거의 재앙이 될 것이란 예상들도 나온다. 한-미 에프티에이 협상 타결로 협정 비준이 머지않을 것으로 보이고, 낙농 강국들이 포진한 유럽연합(EU)과의 협상도 머잖아 마무리될 예정이다. 게다가 낙농 축산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와의 자유무역협정 협상도 진행중이다.

우유시장이 개방되면 신선도를 유지해야 하는 제품들은 그런대로 계속 자리를 지키겠지만 시장이 커지고 있는 치즈 등 유제품 시장에선 국내 제품들이 더욱 밀릴 것으로 보인다. 우유업체들은 연유나 전지분유 등 수입산 원료 가격이 싸져서 유리해지는 측면도 있지만 낙농가들은 고사 위기에 몰릴 가능성이 높다. 미국 아이오와주립대 연구팀의 분석을 보면, 한-미 에프티에이 발효 때 한국의 치즈, 버터, 분유 생산은 2006년에 비해 각각 47.3%, 14.1%, 42.8%씩 감소할 것으로 예상됐다. 한국낙농육우협회가 한-유럽연합 에프티에이 영향을 평가한 자료를 보면 낙농부문 총생산액은 2006년 기준으로 5.6~6.7%(867억~1028억원) 감소하고, 한-오스트레일리아 에프티에이가 체결되면 낙농 총생산액이 2007년 기준으로 6.9~12.1%(1088억~1920억원) 급감할 것으로 전망됐다.

결국 한국 우유도 외국으로 눈을 돌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 다행히 지난해엔 중국 시장 덕을 봤다. 중국보다 품질이 우위에 있었던 요인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국에서 우유 멜라민 파동이 벌어져 반사이익을 본 측면이 크다. 올해 상반기 우유 중국 수출액은 76만달러로 지난해보다 19배나 늘었다. 통관에 걸리는 시간이 1~2일 이내로 단축되면서 최근에는 중국에 우유를 파는 우유 보따리상이 등장했고, 한국 우유를 중국 베이징에서 매일 배달시켜 먹는 것도 가능해졌다. 상온에서 10주 정도 유통 가능한 멸균우유에 이어 유통기간이 9일 정도인 신선우유 수출도 늘어나고 있다. 탈지분유 중국 수출도 올 상반기 132만달러로 지난해보다 130배 늘어났다. 중국 시장이 과연 한국 우유의 돌파구로 자리잡을지 주목된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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