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한겨레

대통령·장관·서울대총장..대이어 '지배 엘리트'

입력 2009. 08. 14. 14:40 수정 2009. 08. 14. 14:40

기사 도구 모음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한겨레] [친일·항일 '굴곡진 100년사']

아들 윤치호 등 7명 친일인명사전 이름 올라

"친일로 얻은 재산 밑천, 해방후에도 승승장구"

99년 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합병 됐을 때 우리나라의 사회지도층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시대에 순응하는 친일의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약 없는 항일의 길이었다.

그 선택은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한겨레>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우리나라의 명문가로 손꼽혔던 해평 윤씨 윤웅렬-윤영렬 가문, 안동 김씨 김가진 가문, 여흥 민씨 민영휘 가문, 우봉 이씨 이완용 가문 등이 걸어온 길을 추적해, 8·15 광복의 현재적 의미를 되짚어봤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99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가장 이름을 떨친 명문가를 꼽으라면 빠지지 않는 집안이 윤웅렬-윤영렬 형제 가문이다. 해평 윤씨로 '노론'의 대가였던 이 가문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1533~1601)의 후손으로 윤보선 대통령, 윤치영 서울시장, 윤일선 서울대 총장 등을 배출했다. 동시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을 추진중인 '친일인명사전'에 7명의 이름을 올렸다.

윤웅렬(1840~1911)은 조선 말기 군부·법부대신을 지낸 뒤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지목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됐다. 그는 아들 셋을 뒀는데, 장남이 중추원 고문을 지낸 치호, 차남은 영국 글래스고 의대를 나와 세브란스병원장을 역임한 치왕, 셋째는 미국 시카고대 출신으로 초대 주영공사와 터키 대사 등을 지낸 치창이다.

윤치호(1865~1945)의 큰아들 영선은 1950년대에 농림장관을, 치호의 손자는 교통부 고위 관리를 지냈다. 윤치호의 증손녀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과 결혼해 아들 형제를 뒀다. 친일인명사전에서 '윤치호 편'을 쓴 김승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윤치호는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경력도 확인되지만, 이후 일왕이 직접 임명한 일본 귀족원의 칙선 의원이 되는 등 적극적인 친일로 기울었다"고 말했다.

윤웅렬의 동생인 영렬(1854~1939)은 6남3녀를 낳았는데, 이 가운데 4명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손자를 포함하면 모두 5명에 이른다. 큰아들 치오와 둘째 치소는 일제 때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이던 중추원의 찬의와 참의를 각각 지냈다. 치오의 장남인 일선은 서울대 총장을, 차남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간도성 차장을 역임했다. 둘째 치소의 장남이 대한민국 두번째 대통령인 윤보선이다.

3남인 치성은 일본 육사(제11기)를 나와 일본군 기병 중좌(중령에 해당)로 있었다. 6남 치영은 일제 말기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 등으로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쳤고, 해방 이후 서울시장과 민주공화당 의장, 국회 부의장 등을 지냈다.

신명식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이사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지금까지도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데 반해, 친일파 후손들은 친일의 대가로 얻은 재산으로 서구와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뒤 신생 대한민국의 지배 엘리트가 됐다"며 "친일파의 후손이라고 연좌죄를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친일파의 후손들도 그 점만은 마음에 담아뒀으면 한다"고 말했다.

일제 때 최대 갑부이자 자작 작위를 받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된 민영휘 후손도 조상의 재산과 지위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이 가문에서는 민영휘 본인과 형식·대식·규식 등 세 아들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대식의 후손은 풍문여고, 규식의 후손은 휘문고(옛 휘문의숙)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친일파 집안이 성공적으로 사회적 지위를 세습했던 것은 아니다. 1920~30년대는 엄청난 변혁의 시대였고, 친일 고관대작들 가운데서는 매국노라는 주변의 손가락질을 못 견디거나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추락한 집안도 많았다.

순종의 장인으로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윤택영은 파산 뒤 중국으로 도피했다가 객사했고, 중추원 고문이었던 송병준의 자손들도 1920년대 중반부터 뿔뿔이 흩어졌다. 이송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박사(국사학)는 "친일파 후손들 가운데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가문도 많다"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한겨레> [ 한겨레신문 구독| 한겨레21 구독]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