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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사탕' 거부한 산부인과 의사들

오윤현 기자 noma@sisain.co.kr 입력 2009. 11. 17. 09:11 수정 2009. 11. 17.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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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입구에 '낙태 수술을 하지 않는다'는 스티커를 붙이는 김 아무개 원장(○○산부인과)의 얼굴에 회한이 번졌다. 돌이켜보면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인공임신중절(낙태) 수술이 불법인 줄 뻔히 알면서도 수술을 할 수밖에 없던 시간들….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20~30대 여성들이 토해내는 (낙태를 해야 하는) 자초지종은 비슷했다. '결혼 전이라서' '경제적으로 낳을 여유가 없어서' '아들이 아니라서'….

김 원장은 안쓰러운 사연에 동정심이 일어 낙태 도구를 들기도 했지만, 사회가 암묵적으로 용인해주는 터라 자연스레 태아를 긁어내곤 했다. "개원하고 3년간 한 달 평균 20여 건씩 (낙태) 수술을 했다. 그런 날은 늘 마음이 불편했다"라고 김 원장은 회상했다.

그러나 이제는 홀가분하다. 지난 10월 중순 동료들과 "11월부터 낙태를 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한 덕이다. 김 원장처럼 '양심선언'한 의사는 680여 명. 거개가 '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모임'(약칭 진오비)의 회원이다. 산부인과 의사들이 낙태금절운동을 벌이기는 대한민국 의학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요즘 상황만 놓고 보면 고생길이 훤하다. 3000명이 넘는 산부인과 의사가 외면하고 있는 데다, 동참했던 일부 의사들마저 슬그머니 발을 빼고 있어서다. 이 문제를 앞장서 해결해야 할 보건복지가족부도 '소 닭 보듯이' 관망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무시무시한 도구들로 이미 숨쉬고, 팔다리가 나 있는 태아를 긁어내거나 빨아들이는 것이 낙태이다.

45만 명 태어나고 34만여 명 수술로 '제거'

왜, 지금 이 순간 이들은 '십자가'를 짊어졌을까. "진오비 회원을 중심으로 꽤 오랫동안 낙태 문제 해결 없이는 산부인과의 여러 난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런데 국감에서 낙태를 용인하는 듯한 보도 자료가 돌아다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라고, 최근 진오비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최근 출범한 가칭 대한산부인과개원의사회 최안나 대변인(아이온산부인과 원장)은 말했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를 성급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종교(가톨릭 등은 낙태를 금한다)와 정부를 배후로 의심한다. 몇몇 의사가 종교적인 신념에서 주도하고 있거나, 혹은 정부가 출산율을 높이려 물밑에서 돕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최대변인은 "절대 아니다. 수십 년간 우리를 옥죈 굴레를 우리 스스로 벗고자 나선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낙태 수술은 '독 사탕'이다. 경제적 이득 때문에 불법인 줄 뻔히 알면서도 낙태를 외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낙태 수술 실태를 들여다보면, 왜 산부인과 의사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 쉽게 납득이 간다. 이제껏 우리나라 낙태 건수는 확실히 밝혀진 적이 없다. 전문가에 따라 50만~200만 사이를 널뛰기한다. 물론 모두 추정치다.

낙태와 관련해 비교적 신뢰받는 수치는 2005년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종합 보고서의 낙태 건수뿐이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2004년 우리나라의 낙태 건수는 모두 34만2433건(기혼 19만8515건+미혼 14만3918)이었다. 그해 신생아가 45만 명 출생했으니까, 한쪽에서는 하루 120여 명의 생명이 출생하고 다른 쪽에서는 100여 명의 생명이 지워진 셈이다.

문제는 낙태가 명백히 불법이라는 점이다. 형법 제269·270조에 따르면, 부녀가 약물이나 기타 방법으로 낙태하면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를 시킨 의사는 2년 이하 형에 처할 수 있다. 의사의 경우 집행유예만 받아도 면허가 취소되니,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면 국내 대다수 산부인과 병원은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12~13주의 태아. 이미 뇌와 심장, 손발이 나 있다(위 왼쪽). 24주 태아. 100%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위 오른쪽).

모자보건법도 예외 조항을 두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한다. 제14조(인공임신중절 수술의 허용 한계)의 5가지 예외 조항은 다음과 같다. ①본인·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 혹은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 질환이 있는 경우 ②본인·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③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 ④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한 경우 ⑤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히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다.

그러나 이같이 합법적인 이유로 낙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2005년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합법 수술은 전체 낙태 건수의 4.4%(1만4900여 건)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나머지 30만 건 이상은 모두 불법 수술이었던 셈이다. 불법 낙태한 사연은 각양각색이었다. 미혼 낙태 여성은 96.0%가 경제적 어려움을 핑계로 댔다.

반면 기혼 낙태 여성은 '자녀를 원치 않아서' '원하는 성별(주로 남자)이 아니어서' '터울을 조절하려' 낙태했다는 여성이 76.7%로 가장 많았다. 심지어 임신 후 감기약을 먹었다는 이유로, 태아가 출생 후 간단한 성형수술로 고칠 수 있는 육손(손가락이 여섯인 질환)이나 입술입천장갈림 질환을 갖고 있다고 해서 수술대에 오르기도 했다. "최근에는 독한 항암제 요법으로 건강한 태아를 낙태하는 수술까지 한다"라고 한 산부인과 의사는 말했다(자궁 외 임신 같은 특별한 경우에만 하는데, 아직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산부인과 의사들은 왜 불법인 줄 뻔히 알면서 낙태를 거드는 것일까. 한 의사는 "임신 여성들의 사정이 딱하고 안타까워서 낙태 수술을 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미혼모 등을 위한 사회적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을 외면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한 의사는 아예 "불법인 줄 모르고 낙태 수술을 한 적이 있다"라고 실토했다. 물론 최대변인의 지적처럼 금전적 보상도 무시못할 이유이다. 비교적 의료 수가가 낮은 산부인과에서 수술비 30만~50만원은 적은 수입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원도 '낙태 공화국' 건설과 유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불법 낙태에 대해 솜방망이를 휘둘러 "낙태를 암묵적으로 방조하고 있는 게 아니냐"라는 지적을 받는 것이다. 지난 10월 초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장윤석 의원(한나라당)은 의미 있는 자료를 공개했다.

그 자료에 따르면 정식 재판에 회부된 불법 낙태 관련자는 2005년 1명, 2006년 5명, 2007년 4명, 2008년 5명뿐이었다. 올해 1~7월에도 29명이 입건되었지만 그중 정식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2명뿐이었다. "법뿐만이 아니다. 낙태에 관한 한 우리 모두가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최 대변인은 말했다.

낙태 논쟁은 자연스레 태아가 생명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으로 번질 수밖에 없다. 낙태를 '살인'으로 규정하는 의사들은 당연히 생명으로 여긴다. 몇 해 전 배아줄기세포 논쟁에서 보듯이 정자와 난자가 수정하면 그 순간(배아)부터 '생명'인 것이다. 대법원 판례에도 "인간의 생명은 잉태된 때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회임된 태아는 새로운 존재와 인격의 근원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니므로…"(1958년 대법원 판례집 제33권)라고 나와 있다.

배아가 이러할진대 하물며 12주 된 태아(우리나라 낙태 수술의 96% 이상이 이 시기 이전에 행해진다)와 24개월 태아(모자보건법에서 합법적인 이유로 낙태해도 된다고 정한 '상한선')는 더 말해 무엇하랴. 한 산부인과 의사는 "나 스스로 그냥 일이라 여기고 낙태를 했지만 끔찍하다. 태아가 12주가 되면 뇌와 심장, 손발이 다 생긴다. 이쯤 되면 머리통을 부수고 손발을 분리해 긁어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용기 있는 의사들의 양심선언으로 침묵의 카르텔이 깨졌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우선, 낙태를 추방하거나 제도를 보강해 낙태율을 줄여야 할 보건 당국의 입장이 애매하다. 보건복지가족부 장미경 사무관(가족건강과)은 "정부는 낙태 근절 선언을 환영한다"면서도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를 보면 알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낙태 근절 혹은 낙태율을 낮추는 일의) 속도를 높일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의사회)도 낙태 허용에 대한 법의 한계가 애매하고, 사회가 여러 사유로 (낙태를) 눈감아주는 현실에서 낙태 근절에 동참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부적절한 임신을 예방하고 계도하는 사회 인프라 구축의 절대적인 부족과 관계 기관의 무대응·무대책이 문제의 핵심인데, (선언에 참여 안 한) 의사들에게만 책임을 강요하고 있다"라고 의사회 백은정 공보이사는 말했다. 현재 의사회는 낙태 수술에 대한 판단을 의사 개개인에게 맡겨놓고 있다.

최안나 원장은 "이번 기회에 낙태가 근절된다면, 그 어떤 개인적인 피해도 감수하겠다"라고 말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미온적

최안나 대변인은 두 기관 모두 곪아 터진 낙태 문제를 얼렁뚱땅 덮고 가려 한다고 말했다. "만약 보건 당국이 낙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면, 이미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을 것이다. 그런데 금연은 텔레비전 캠페인까지 하면서, 낙태 문제에 대해서는 늘 미온적이었다"라고 말했다.

의사회에 대해서는 그는 "이쯤 되면 낙태 문제를 심각히 고려해보겠다는 성명이라도 나와야 한다. 그런데 의사회는 오히려 최근 각 병원에 언론의 낚시질(함정 취재)을 조심하고, 낙태 수술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공문까지 보냈다"라고 말했다.

최대변인을 포함한 양심선언한 의사들의 믿음은 확고하다. 의사들이 먼저 낙태 수술을 중단해야 피임도 늘고, 혼전 임신에 대한 두려움도 커져 산부인과를 찾는 여성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 일을 앞당기려 앞으로 전국 산부인과에 낙태근절운동 동참을 호소하는 포스터와 스티커를 배포하고, 병의원과 사회단체에 낙태 시술에 대해 질의하고 그 답변을 12월1일부터 가칭 낙태근절운동본부 홈페이지(www.antidc.org)에 게시할 예정이다.

과연, 이들의 '싸움'의 끝은 어디일까."이 번에 내가 생명을 죽이려 의술을 배운 게 아니라, 생명을 살리려 배웠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라는 한 산부인과 의사의 말이 귀에 쟁쟁하다.

오윤현 기자 / noma@sisain.co.kr- 정직한 사람들이 만드는 정통 시사 주간지 < 시사IN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시사IN 구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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