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가 접수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입력 2009. 12. 21. 10:28 수정 2009. 12. 2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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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과거청산을 통해 국민 화해와 통합의 발판을 마련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과거사 청산 작업이 뉴라이트 출신 등 보수 인사들 손으로 넘어가 용두사미로 끝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일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12월 초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 신임 위원장으로 보수 단체 출신인 이영조 전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사무총장을 임명했다. 이어 12월10일에는 차관급 상임위원으로 뉴라이트 싱크넷에서 상임집행위원을 맡았던 김용직 성신여대 교수(50)를 임명했다.

이영조 신임 진화위 위원장은 2004년 총선 당시 한나라당 경기도 분당 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했다가 탈락한 뒤 그동안 진화위에서 한나라당 지명 상임위원으로 활동해왔다. 그는 12월2일 위원장 취임사에서 그동안 진화위 활동이 예산 낭비성 비효율로 점철됐다고 질타했다. 이어 '위원회 활동이 제3자의 눈에 편향되었다고 비칠 소지가 적지 않았다'는 말로 국가 차원의 과거청산 작업을 둘러싼 보수 세력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했다. 진화위에 접수된 신청 사건이 본래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과 권위주의 정권 치하의 인권침해 사건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그의 이런 발언에 내부 직원들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과거사정리위원회 신임 위원장으로 임명된 이영조 교수

청와대가 신임 상임위원으로 지명한 김용직 교수를 둘러싸고는 논란이 더욱 크다. 그는 뉴라이트가 현행 고교 역사 교과서에 대항해 만든 <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 집필진이기도 하다.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 인식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근대화로 미화하고, 안중근·김구 등 대표적 독립운동가를 테러리스트 취급하는가 하면 일제 정신대 문제를 마치 자발적 경제활동이었던 것처럼 주장한다는 점에서 도가 지나친 역사 왜곡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런 이유를 들어 민간인 학살 피해 유가족과 인권·사회 단체들은 뉴라이트 싱크넷 소속인 김용직 교수가 과거사 청산 업무에 부적합하다고 반발하는 것이다. 그 밖에도 김씨는 지난 5월 열린 촛불집회 평가 토론회에서 "남한의 친북주의자들이 이명박 정부를 강타하기 위해 촛불집회에 집결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군중을 선동했다"라고 주장해 논란을 빚은 일도 있다.

이런 그가 진화위에서 맡게 될 분야는 국가의 부당한 인권유린의 상징적 사건이라 할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집단학살 문제를 다루는 집단희생규명위원회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진상규명 신청 사건은 그동안 진화위에 접수된 1만1000여 건 중 가장 많은 8200여 건을 차지한다. 진화위에서는 이런 진정을 토대로 지난 4년 동안 전국의 민간인 학살 현장을 발굴 조사해 국가가 불법으로 목숨을 빼앗은 1만여 명의 희생자 신원을 파악하고 유골을 발굴했다. 이 가운데 전국 단위의 대규모 학살사건으로는 최근 진화위가 4600여명 희생자 명단을 발굴한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들 수 있다.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 김용직 교수

김용직 상임위원은 아직 조사가 남아있는 굵직한 집단 희생 사건들인, 미군기 폭격으로 인한 집단 학살과 1948년 발생한 이른바 여수순천반란 사건 당시 민간인 집단 학살,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 수원 이남 전국 각지의 교도소에서 저질러진 군경 우익단체에 의한 재소자 집단 처형사건 등을 새로 맡게 된다. 이들 사건은 보수 세력 내부에서 그동안 쉬쉬하거나 학살의 불가피성을 주장해온 민감한 사안들이다.

그런 점에서 김용직 상임위원이 맡을 이 분야에 대해 위원회 내부 실무자들의 우려도 적지 않다. 한 관계자는 "위원회 설립 목적과 취지에 비춰볼 때 김용직 상임위원이 너무 이 분야 비전문가라는 점이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보수주의적 시각을 논외로 하더라도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은 일제강점기 사회운동을 전공한 김용직 교수의 전문성과는 너무 동떨어진 주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진화위에 접수된 미군 폭격 희생 사건은 경북 포항과 예천, 인천 월미도, 경기도 평택 등 여러 곳에 이른다. 대부분 미국 공군기가 피난민과 주민을 상대로 기총소사를 하거나 네이팜탄으로 대량 학살을 저지른 사건들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미군 폭격 사건 관련 자료와 목격자 등 참고인을 명확히 찾아내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결국 포괄적 증언과 정황 증거를 인정하면 학살 진상이 규명되겠지만 엄격한 증거 서류를 요구한다면 진상규명 불능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다. 전쟁 시기 인권 유린과 한·미 관계를 바라보는 보수 세력의 기존 시각을 대표하는 김용직 상임위원 체제에서 이들 사건에 대한 적극적 진상규명이 어렵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진화위 '흐지부지 위원회'로 전락하나

지난 4년간 진화위에 접수된 처리 대상 사건은 총 1만1031건인데 지금까지 8229건(약 75%)에 대한 조사를 완료했다. 진실이 규명된 사건은 6343건이었으며 '규명 불능' 사건은 137건이었다. 이영조 위원장 체제가 들어서기 전인 지난 11월까지 진화위에서는 그간의 조사 내용을 토대로 정부에 후속 조처를 권고해왔다. 민간인 학살 문제를 해결할 재단 설립과 발굴된 뒤 방치되어 있는 유해 안치시설 마련, 그리고 유족에 대한 배·보상 문제 해결 등이다. 또 그동안 조사로 드러난 인권침해 기관을 상대로 국가적 차원에서 인권교육을 실시하는 등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라는 권고도 했다. 이런 내용은 소책자로 제작돼 청와대와 국회에도 전달됐다.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경남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에서 '부산·경남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 관련 유해 발굴 현장설명회'를 갖고 있다.

하지만 진화위의 이런 중간 권고사항에 대해 정부는 아직 이렇다 할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나마 받아들인 것이라면 집단 희생된 민간인 위령제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원 정도다. 또 최근에는 집단 학살이 일어난 지역의 경찰서장이나 군 부대장이 유가족을 찾아와 사과를 하는 곳도 늘고 있다. 작으나마 이런 분위기는 지역사회의 화해와 통합을 위해 상징적 의미가 큰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진화위는 내년 4월까지 업무를 마치고 10월에는 모든 활동을 종료하게 돼 있다. 물론 필요할 경우 활동 기한을 2년간 연장할 수 있도록 법에 규정돼 있지만 이명박 정부는 진화위 활동 연장에 반대하는 편이라 존치될 확률은 높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신임 이영조 위원장 체제의 진화위에 남겨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남은 조사사건 마무리와 종합 보고서 작성 및 정부에 대한 권고사항 마무리 등 후속 작업이다. 하지만 지난 4년간 사건을 맡아오던 상임위원이 대부분 물러나고 그 자리를 전원 한나라당 추천 외부 인사가 채우면서 이미 마련한 종합 보고서와 정부가 해야 할 후속 조처를 담은 권고사항이 축소 약화되리라는 염려가 일고 있다. 이영조 신임 위원장은 이런 비판을 의식한 듯 취임 후 "설탕이 들어 있는 독배를 든 심정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그가 '정부에 부담 주지 말고 위원회를 잘 해체하라'는 집권 여당의 특명만을 좇는다면 관련 유족의 반발은 물론 역사에도 큰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다.

정희상 기자 / minju518@sisain.co.kr- 정직한 사람들이 만드는 정통 시사 주간지 < 시사IN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시사IN 구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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