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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53) 조선에 전래된 고구마·감자 이야기

입력 2010.01.12. 21:51 수정 2010.01.12.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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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거리 해결은 국가의 존립·생존의 문제고구마는 日서 전래… 감자는 淸·英 유입설조선후기 겨울서 봄까지 기근 해결 큰 도움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 되면 늘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옛날에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가족과 함께 먹던 식품이었고, 요즈음에는 포장마차에서 만날 수 있는 식품. 바로 고구마이다. 특히 한겨울 군고구마를 먹으며 손이 새까맣게 되었던 기억은 누구라도 가지는 흔한 기억들이다. 지금은 기호식품으로 주로 활용되고 있지만 조선에 처음 도입되었을 때는 기근을 극복할 수 있는 구황식품으로 각광받았던 것이 고구마와 감자였다. 조선후기 일본과 청나라에서 전래되어 이제 우리와는 너무나 친숙한 겨울 음식이 된 고구마와 감자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연해 지방 고을에는 이른바 고구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구마는, 명나라의 서광계가 편찬한 '농정전서(農政全書)'에 처음 보이는데 칭찬을 하며 말하기를 '그것은 조금 심어도 수확이 많고,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가뭄이나 황충(蝗蟲:메뚜기 떼의 피해)에도 재해를 입지 않고, 달고 맛있기가 오곡과 같으며, 힘을 들이는 만큼 보람이 있으므로 풍년이든 흉년이든 간에 이롭다'고 하였습니다."〈정조 18년 서영보 특별보고〉◇경기 여주의 한 진상품 재연 행사에서 최고 상궁이 임금에게 여주 고구마를 올리고 있다.

#1. 생존의 문제, 구황식품

고구마와 감자는 무엇보다 구황(救荒)식품으로 활용되었다. 구황식품은 먹을거리가 특히 부족했던 겨울과 봄까지 우리 조상들의 목숨을 이어지게 한 중요한 식품이었다. 구황식품은 한자로는 구할 구, 거칠 황, 아주 먹을거리가 황폐화된 상태에서 목숨을 구해주는 식품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의 먹을거리를 해결해주는 것이 국가의 중요한 과제였다. 먹을거리의 해결은 지금처럼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존립과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구황'이라는 용어가 980여건 기록된 것은 그만큼 구황의 비중이 컸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적으로 구황 정책을 펴 나갔다. 국가에서는 주로 '진휼(賑恤)', '진제(賑濟)', '구휼(救恤)', '구제(救濟)'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조선 명종 때 언해본으로 편찬된 '구황촬요'를 보면 고구마가 소개되기 전까지 조선의 대표적 구황식품은 소나무 껍질이었음을 알수 있다.

'태조실록'에서부터 구황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1397년(태조 6) 9월의 기록에 "경상도는 수재·한재로 인하여 농사를 실패하였으니, 그 도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군기(軍器)를 월과(月課)하는 것을 파하고, 오로지 구황하는 것을 힘쓰게 하라"는 내용이 보인다. '세종실록'에는 '흉년에 대비해 일정한 수량의 도토리를 예비하도록 하다'는 기록(세종 6년 8월 20일)이 나타나 도토리가 구황식품으로 적극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직후인 1593년 '선조실록'의 기록에는 구황이란 단어가 13번 나올 정도로 구황이 중요한 정치, 사회문제임을 짐작하게 한다. 굶주린 백성 구제를 위해 황해도에서 소금을 굽기도 했다. '황해도의 초도(椒島)·백령도·기린도 등에서 소금을 구워 곡식을 무역(貿易)하는 것이 국가에 피해가 없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선조실록' 선조 26년 7월 1일)는 기록이 보인다.

구황에 관해 체계적인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서적 편찬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세종 때는 '구황벽곡방(救荒壁穀方)'이 편찬되었으며, 명종 때는 '구황촬요(救荒撮要)'를 언해본으로 편찬하기도 하였다. 선조는 "진휼할 때에 '구황촬요'에 기록되어 있는 상실(橡實)·송피(松皮)·초식(草食) 등의 물품도 조처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소나무 껍질이 대표적인 구황식품임을 알 수 있다. 소나무는 잎을 비롯해 솔방울, 송진, 소나무 껍질 등 매우 다양하게 구황식품으로 이용되었다. 정조시대의 학자 서유구는 '촉나라에는 토란이 있어 백성들이 덕분에 굶주리지 않았고, 우리나라의 경우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소나무 껍질과 칡뿌리로 크게 기근을 구제할 수 있었으니 이는 모두 징험할 만한 일로 이미 시험해 효험을 본 것입니다'라고 하여 소나무와 칡뿌리가 대표적인 구황식품임을 언급하였다. 소나무 뿌리, 칡뿌리로 연명하던 어두운 시대에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로 다가온 식품이 바로 고구마와 감자였다.

#2. 고구마의 전래와 재배

◇서유구의 초상. 서유구는 1834년 저술한 '종저보'를 통해 고구마 재배법을 소개했다.

조선후기에는 고구마와 감자가 도입되면서 구황식품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고구마는 17세기 중엽부터 통신사나 조선에 표류한 왜인 등을 통해 그 존재가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763년(영조 39)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 온 조엄이 고구마 종자를 들여와 동래와 제주도에서 시험 재배하였다.

고구마를 '조저(趙菹)'라 하는 것은 조엄이 들여왔기 때문이다. 이후 고구마는 흉년에도 잘 자라 주로 제주도와 남부 해안가 지역에서 경작되기 시작했다. 1778년(정조 2) 박제가가 쓴 '북학의'에는 '나라에서 관리를 시켜 고구마를 따로 심게 하고, 서울의 살곶이와 밤섬 등에도 많이 심게 한 적이 있어서, 백성들에게 스스로 심게 한다면 잘 번식할 것이다'고 하여 고구마가 현재 서울의 뚝섬, 한강의 밤섬 등에서 경작된 정황을 알 수가 있다. 고구마에 대해서는 '정조실록' 정조 18년(1794) 12월 25일에는 호남 위유사(지방 사정을 살피고 백성을 위무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로 파견된 서영보가 올린 특별 보고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연해 지방 고을에는 이른바 고구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구마는, 명나라의 서광계가 편찬한 '농정전서(農政全書)'에 처음 보이는데 칭찬을 하며 말하기를 '그것은 조금 심어도 수확이 많고,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가뭄이나 황충(蝗蟲:메뚜기 떼의 피해)에도 재해를 입지 않고, 달고 맛있기가 오곡과 같으며, 힘을 들이는 만큼 보람이 있으므로 풍년이든 흉년이든 간에 이롭다'고 하였습니다. 수천 마디를 늘어놓으며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말한 것을 보면 그 말이 반드시 속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고구마 종자가 우리나라에 나온 것이 갑신년이나 을유년 즈음이었으니 지금까지 30년이나 되는 동안 연해 지역의 백성들은 서로 전하여 심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 이 곡물은 단지 민절 지역에서만 성하고 우리나라가 종자를 얻은 것도 일본에서였으니, 이것의 성질이 남방의 따뜻한 지역에 알맞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마가 1764년과 1765년경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는 것과 풍년이나 흉년 모두에 잘 자라나서 구황에 유리한 식품임을 언급하고 있다. 한편 고구마 종자의 도입을 고려시대 문익점이 목화씨를 도입한 것에 버금가는 성과로 이해하기도 했다.

"세상에 이와 같이 좋은 물건이 있어 다행히 종자를 가져오게 되었으니, 국가로서는 마땅히 백성들에게 주어 심기를 권장하고 풍속을 이루게끔 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좋은 혜택을 받기를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처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번식도 하기 전에 갑자기 가렴주구를 행하여 어렵사리 해외의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좋은 종자를 오래 자랄 수 없게 하고 씨받이 종자까지 먹어버렸으니, 어떻게 종자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 기록이 대표적이다.

#3. 고구마에 관한 서적들

조선후기에도 고구마 종자가 번식력이 뛰어나므로 이를 잘 재배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남방의 토지 성질은 어디든 고구마 심기에 알맞지 않은 곳이 없는데, 오곡을 심기에 적당치 않은 산밭이나 돌밭에는 더욱 심기가 좋습니다. 그러니 우선 삼남 연해안 고을과 섬 지방부터 널리 심기를 권장하고 차차 토질이 알맞은 곳에 보급시켜 나간다면 서북 지역 외의 6도에는 심지 못할 곳이 없을 것입니다. 제주도의 3읍에 있어서는 아주 작은 섬이라 호령이 행해지기 쉬울 것이고 또 대마도와 마찬가지여서 토질에도 적합할 것입니다. 이렇게 잘 심으면 비록 흉년을 당하더라도 거의 배로 곡식을 실어 나르는 폐단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제주도를 비롯한 남해안 지역에서 고구마가 재배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음이 나타난다.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에 있는 조엄 묘역.

고구마의 전래와 더불어 그것에 관련된 서적들도 많이 나왔다. 18세기 말 서호수가 편찬한 농서인 '해동농서(海東農書)'의 '감저조(甘藷條)'에는 고구마의 13가지 이점과 함께, 고구마를 구황작물로 소개하였다. 감저(甘藷)는 '달 감(甘)', '마 저(藷)'에서 나온 것으로, 고구마를 지칭하였다.

1766년(영조 42) 강필리는 '감저보'를 저술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고구마 전문서적이다. 1813년에는 김장순과 선종한이 '감저신보(甘藷新譜)'를 지었다. 김장순은 남쪽 해안 지방에서 고구마를 먹어보고 구황작물로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김장순은 전라도 보성에서 9년 동안 고구마를 연구한 선종한을 만나 서울에서 시험 재배에 성공하여 고구마 재배에 불을 지폈다.

1834년 서유구는 '종저보(種藷譜)'를 저술하여 일본과 중국의 서적을 참조하여 고구마 재배법을 소개하였다. 19세기 초에 이르면 고구마는 남해안 지역의 특산물이 되어 특히 제주도와 강진의 고구마가 유명하였다. 19세기의 학자 이규경은 백과사전적인 저술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고구마가 전파된 지 80여년이 지났지만, 기호지방에는 보급되지 못하고 남방의 연해읍에서 재배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무렵 기호, 관동 지역에서 고구마의 '최대 라이벌'인 감자가 보급됨으로써 고구마가 확산되지 못한 것으로 풀이된다.

#4. 감자의 전래와 보급

조선시대에 감자는 북저(北藷) 또는 토감저(土甘藷)라 불렀다. 감자의 유입에 대해서는 북방유입설과 남방전래설이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감자는 19세기 초인 1824년 경 국경인 두만강을 넘어 들어왔다고 한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보면 감자는 19세기 초 두만강을 넘어 청나라에서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창한의 '원저보'에는 영국의 선교사가 감자 씨앗과 재배법을 전수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인삼을 캐려고 국경을 넘어온 청나라 사람들이 산속에서 감자를 경작해 먹다가 국경을 넘어 돌아가면서 밭이랑 사이에 감자를 남겨 놓고 갔다는 것이다. 생김새는 무나 토란처럼 생겼으나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해 우리 쪽 국경으로 옮겨 심었는데 크게 번식하였다. 김창한의 '원저보'에는 영국 선교사에 의해 감자가 전래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1832년 영국 상선이 전라북도 해안에서 약 1개월간 머물렀는데, 그때 선교사가 감자를 나누어주고 재배법도 가르쳐 주었으며 김창한이 그 재배법을 수록하여 '원저보'를 편찬했다고 한다.

감자는 고구마에 비해 전래와 동시에 전국에 널리 퍼지게 된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감자가 전파되면서 구황과 생계에 도움이 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감자가 보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곳곳에서 감자를 심어 이득을 얻고 있으며, 특히 양주, 원주, 철원 등 강원도 지역에서는 흉년에 기아를 면하는 작물이라고 언급을 하였다. 함경도 경성부 관할 수성역과 20리 떨어진 산골짜기 촌락에는 50∼60호 가구가 있는데 이들은 감자만 심어 1년의 양식을 마련한다고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하였다.

감자는 북쪽에서부터 사방에 퍼져 생산하지 못하는 곳이 없었고, 감자나 줄기만 확보하면 종자를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또한 줄기만 꽂아도 살아나는 등 재배가 쉽고 재배 조건도 까다롭지 않아 백성의 구제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도입된 감자와 고구마는 외래작물이지만 조선후기에는 구황식물로 깊은 사랑을 받았고 현재까지 우리들의 식탁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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