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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신라, 대결·갈등 속 민족공동체 의식 '싹'

입력 2010.03.18. 18:10 수정 2012.10.2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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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민족 시원, 만주] 동아시아 네트워크, 발해의 길 (2)

초기엔 39개 역참 갖춘 '신라도' 통해 긴밀 교류

동족보다 외세와 손잡은 대가, 남북한 교훈으로

문화적인 측면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증거를 더 살펴보자. 문화적인 계승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무덤이다. 장묘문화가 가장 보수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정혜공주 묘(문왕의 둘째딸)나 정효공주 묘, 삼령분 등 발해의 왕릉과 지배층의 석실묘는 발해가 고구려의 풍속을 계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묘제는 대체로 돌을 많이 이용하고, 당나라는 벽돌을 주로 쓰는 것이 특징이다. 말갈의 전형적인 묘제는 흙구덩이에 매장하는 토광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고구려나 발해유적에서 토광묘가 나온 것을 증거로 발해와 고구려를 말갈계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토광묘는 당시 고구려나 발해의 서민들 대부분이 사용하던 매장 방식이었고, 인류 보편의 매장문화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래서 발해의 석실분이나 석관묘 등의 돌무덤 떼 주변에서 토광묘가 함께 발굴되는 것이다. 토광묘를 근거로 발해를 말갈계로 분류할 수 없는 이유다.

무덤과 온돌, 발해의 고구려 계승 강력한 증거

발해의 고구려 계승을 설명하는 중요한 유물이 온돌이다. <구당서>에는 고구려의 주거 문화가 잘 묘사되어 있다. "산골짜기에서 산다. 집은 띠로 이엉을 엮어 이어 짓는다.(중략) 겨울철에는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숯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하는 온돌 장치를 하였다." <구당서>가 이렇게 쓴 것은 고구려인의 주거생활이 당나라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한국학계에서는 온돌의 기원을 고구려로 본다. 실제 중국과 북한의 고구려 유적지에서 온돌이 발견되었고, 발해 유적지에서도 마찬가지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의 궁성 서쪽 '침전터'와 북한의 함남 신포시 오매리 발해 유적지에서 구들 흔적이 발견되었다. 온돌은 말갈 지역으로 불리는 고구려와 발해의 변방 지역에서도 발견되지만, 당나라 유적지에서는 나왔다는 보고가 없다. 온돌 유적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문화의 독자성과 계승성을 증명한다.

남북국시대, '신라도'의 의미

이렇게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한국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나? 이는 발해와 신라가 공존했던 시기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조선시대 역사학자인 유득공(1749~1807)이 이 시대를 '삼국시대'에 이은 '남북국시대'로 규정하였고, 이것이 한국사학계의 보편적인 인식이 되었다. 삼국이 서로 협력하고 싸우면서 삼국시대를 형성했던 것처럼, 남북국도 교섭과 대결을 통해 '역사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남북국은 역사공동체로 부를 수 있을 만큼 적극적인 교섭과 대결을 펼쳤나? 우선 '신라도'라는 것이 있다. 신라도는 발해의 5가지 대외 교통로 중의 하나다. 신라 천정군(지금의 함경남도 덕원)에서 발해의 책성부(중국 길림성 훈춘)까지 연결하는 길로, 39개의 역참이 있었다고 기록된다. 두 나라가 긴밀하게 교류했다는 증거이다.

발해는 개국하자마자 신라 왕실과 접촉을 시도한다. 당의 방해 속에서 어렵게 발해를 개국한 고왕 대조영은 즉위 2년째인 700년에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사신을 파견한 일이 있었다.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멸망한 사실을 교훈으로 삼아 이를 미리 차단하기 위한 외교정책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의 최치원은 당에 보낸 편짓글에서 "(발해가) 처음 거처할 고을을 세우고 인접하기를 청하였기에 그 추장 대조영에게 비로소 신라의 제5품 대아찬의 벼슬을 주었다"고 전한다. 발해 대조영이 대아찬 벼슬을 받은 것을 명분으로 신라가 발해 건국을 묵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발해가 신라에 조공이나 다른 정치적 배려를 하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발해 건국 초기 남북이 당으로부터 일정한 자주성을 확보하면서 평화적으로 교섭한, '근친원교'(近親遠交) 외교의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발해의 신라 협공 계획

그러나 두 나라의 평화적 교섭은 오래가지 못했다. 신라와 발해가 직접적으로 충돌한 것은 732년에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하자 신라가 이 전쟁에 끼어들면서 발단이 되었다. 발해와 당은 발해 건국 과정에서부터 대립관계에 있었다. 당은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발해의 지배 아래 있는 흑수말갈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 했다. 이것이 발단이 돼 발해가 수륙양면으로 당나라를 공격하였다. 이때 신라는 발해가 아니라 당나라를 돕기 위해 군대를 발해의 남쪽 국경에 파견하였다. 험한 날씨 탓에 신라군이 중간에 철수하면서 두 나라가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국은 본격적인 대결 국면에 돌입한다. 발해 3대 문왕은 일본과 함께 신라를 협공하려고 '신라협공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안사의 난' 등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일본 내부 사정으로 무산되었다.

이렇게 군사적 긴장관계에 놓였던 두 나라는 신라의 국내 정치 변화에 따라 다시 교섭 국면에 돌입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원성왕(790년)과 현덕왕(812년)이 각각 '북국'(발해)에 6두품급의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원성왕과 현덕왕은 모두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정통성이 약했고, 국내의 정치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해와 교섭을 활용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우리 민족 최초의 해외 파병

남북국의 교섭은 8세기 초 발해가 영토 확장에 나서고, 신라와 당나라가 군사 협력을 맺음으로써 다시 대결 구도로 치달았다. 당나라는 819년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신라에 3만 명의 파병을 요청하였고, 신라는 이를 수용했다. 당시 3만 명이면 엄청나게 큰 규모였다. 한국사 최초의 해외 파병이라고 할 만 하다. 이사도는 고구려계인 이정기의 손자로 산둥반도에 진출해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은 고구려계로 분류할 수 있는 이사도의 반란을 토벌하는데, 신라를 끌어들여 남북국 대결 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한 셈이다. 이 사건으로 신라와 당이 가까워지는 계기는 되었지만, 남북국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신라는 826년 1만 명을 동원해 발해와 국경에 성을 쌓는 등 발해를 상대로 한 국방력을 강화했다.

거란에 망한 발해, 거란을 도운 신라

발해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신라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발해가 멸망기에 접어든 10세기, 국력이 기운 발해 왕조는 신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거란국지>는 거란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발해의 마지막 황제 대인선이 은밀히 '신라(후삼국)의 여러 나라'들에 구원을 요청해 약속을 받았다고 전한다. 누란의 위기 속에서 발해는 왜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였을까? 두 나라가 비록 긴장 관계에 있었지만, 삼국시대 이후 이어온 민족적 공동체 의식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발해를 돕기로 했던 신라는 약속을 어기고 발해 대신 거란을 도왔고, 그 공으로 선물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신라가 거란을 돕는 데 군사적 지원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국제정세로 보면 신라가 가만히 있기만 해도 거란을 돕는 꼴이 된다. 발해는 결국 신라의 도움을 받지 못했거나, 신라의 방관으로 거란에 망한 셈이다.

남북국시대의 교훈, 근친원교인가, 원교근공인가?

남북국시대 교섭과 대결은 오늘날 어떤 교훈을 주나? 남북 교섭에서 신라의 지배세력들은 국내 정치의 위기를 발해와의 외교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다. 반면 발해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고구려가 멸망한 것에 대한 감정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늘 긴장 속에서 신라와 교섭할 수밖에 없었다. 또 남북국은 당과 일본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였고, 남북교섭은 차선책이나 보조적인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남북국시대 200여 년간 원교근공(遠交近攻) 외교가 지속되었고, 정치 군사적 대결이 굳어졌다. 또 삼국시대로부터 이어온 우리 민족의 언어·문화적 동질성이 크게 약화되었다. 두 나라의 언어와 풍속이 점점 달라지면서 신라에 흡수된 고구려 후손들은 발해는 물론 거란 속의 발해인과 여진을 다른 종족으로 보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는 오늘날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를 둘러싸고, 숨가쁘게 전개되는 국제적인 외교상황과 너무도 흡사하다. 또 나라가 망한 뒤 발해 사람들의 운명은 우리 민족의 미래에 대한 예시와도 같다.

한규철 경성대학교 사학과 교수, 정리=박종찬 기자 pjc@hani.co.kr

◈한규철 교수

= 경성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사단법인 고구려발해학회 회장. 한국고대사학회 고문. 부산경남사학회 회장, 중국의 고구려사왜곡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고구려연구회 회장, 러시아 사회과학원 극동역사고고연구소 초빙교수, 중국사회과학원 흑룡강성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일본 국학원대 대학원 객원연구교수. '발해의 대외관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의 대표적인 발해사 연구자다. 저서로 '발해의 대외관계사-남북국의 형성과 전개'가 있으며 다수의 공저, 논문을 발표했다. 학술 활동 외에도 언론 기고와 각종 강연, 누리집 활동을 통해 발해사에 대한 인식을 확산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누리집 www.palhae.org

일본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발해 등의 터전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곳곳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만주 일대에서는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자칫 웅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평화인권단체인 좋은벗들(이사장 법륜스님)은 해마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만주 역사기행'에 나서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역사특강을 개최한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열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는 동북아 문명의 시원인 요하문명으로부터 시작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와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한겨레>는 법륜 스님 등 다섯 명의 특강 내용을 11차례로 나눠 영상과 함께 <인터넷한겨레>에 싣는다. 우리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다잡고 역사적 지평을 넓히는 길안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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