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수첩-MBC 파업, 20년 인연 '눈길'

김성후 기자 2010. 4. 28.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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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와 스폰서' 방영 이후 파업 지지 봇물 1990년 PD수첩 결방..'50일 파업' 연결

"'PD수첩'이 '검사와 스폰서' 편을 방영한 이후 MBC 파업이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어요." MBC 문지애 아나운서는 MBC 파업이 4주째로 접어든 26일 사내 집회 사회를 보면서 이같이 말했다.

문 아나운서의 말대로 'PD수첩'이 노조 파업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방송 이후 MBC 노조 홈페이지와 노조 카페 '힘내라 MBC'에는 "PD수첩을 보고 MBC를 지켜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았다"(황동연) 등 파업을 지지하는 일반 시민들의 글이 쇄도하고 있다.

각종 물품이나 지지성금도 잇따르고 있다. MBC 노조에 따르면 지난 주말에만 시민 120여 명이 성금 1천만여 원을 보내온 것으로 집계됐다. 신용우 노조 사무처장은 "PD수첩 방송 이후 'MBC를 지켜달라'는 격려와 함께 성금이 쏟아지고 있다"며 "조합 통장이 시민들의 성금으로 가득 차 통장을 교체했다"고 말했다.

"PD수첩 보도는 공영방송이 왜 필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줬다"는 평가 속에 김재철 사장의 강경 대응 방침으로 장기화되고 있는 파업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 MBC 한 PD는 "PD수첩은 왜 우리가 파업하는지 알려주는 상징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또한 잠시 지쳐 있었던 노조원들의 마음을 다잡게 만든 효과도 가져왔다. MBC 한 기자는 "이런 방송을 내보낼 수 있는 MBC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며 "PD수첩 보도는 MBC 구성원들이 권력에 대한 비판과 감시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 파업을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다"고 말했다.

20년 전인 1990년 PD수첩은 한국 언론 역사상 당시까지는 최장 기록이었던 1992년 'MBC 50일 파업'의 불쏘시개가 됐다.

MBC에 공권력이 투입돼 노조 집행부가 구속되고 수백 명의 노조원이 연행되면서 파국으로 끝났던 MBC 50일 파업의 직접적인 원인은 단체협약의 공정방송 조항 삭제 여부 등을 둘러싼 노사간 대립이었으나 그 동인은 1990년 9월4일 'PD수첩' 결방이었다.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직전의 농촌의 절박한 현실을 담은 PD수첩 '그래도 농촌을 포기할 수 없다' 편이 예고편까지 나갔으나 방송 몇 시간 전에 결방됐다. 당시 MBC 최창봉 사장은 남북 고위급 회담에 북측 인사들이 오는데 이런 프로그램이 나가면 수치라며 방송 연기를 중단해 제작진과 마찰을 빚었다.

이 사건에 이어 1991년 1월부터 모두 50회 예정으로 인기리에 방송되던 대하드라마 '땅' 이 경영진의 일방적인 지시로 중도하차했다. 경영진의 전횡에 대한 누적된 불만은 공정방송 조항 등을 놓고 노사가 충돌하면서 '1992년 최창봉 사장 퇴진과 구속동지 석방을 위한 MBC 50일 파업'으로 연결됐다. <copyrightⓒ 기자협회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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