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화, 나라도 양보했어야 하는데.. 너무 후회스럽다"

김재중·이인숙·김광호·안홍욱 기자 2010. 7. 2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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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서전 머릿말에서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생 끄트머리에서 돌아보니 너무도 많은 고비들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대통령이 되기까지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 6년간 감옥에 있었으며 수십년 동안 망명과 연금생활을 해야 했던 김 전 대통령이 정치역정의 고비들을 돌아보며 밝힌 소회가 절절이 자서전에 담겨있다.

1980년 9월17일 계엄군법회의에서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대통령 재임 이전

◇대통령이라는 꿈의 씨앗(1970년) =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길은 열렸다. 우리는 다시 싸워야 했다. 신민당의 잠재적 후보는 유진오 총재였다. 그러나 대변인으로서 곁에서 지켜본 유 총재는 정치적 안목과 지도력에 문제가 있었다. 나는 이 문제로 혼자 고민을 거듭했다. 그때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던 이용희가 말했다. "형님이 대통령 후보로 나가십시오." 나는 순간 영감 같은 것을 받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만난 예수(1973년) = 모든 것이 소용없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그때, 바로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나는 기도드릴 엄두도 못 내고 죽음 앞에 떨고 있는데 예수님이 바로 앞에 서 계셨다. 아, 예수님! 성당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고, 표정도 그대로였다. "살려 주십시오. 아직 제게는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저를 구해 주십시오."

◇사형(1980년) = 9월17일. 재판장의 입을 뚫어지게 보았다. 입술이 옆으로 찢어지면 사, 사형이었고, 입술이 앞쪽으로 튀어나오면 무, 무기 징역이었다. 입이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었다. 재판관의 입이 찢어졌다. "김대중, 사형."

◇단일화 실패, 그리고 패배(1987년) = 선거가 끝나자 국민들은 큰 상실감에 빠졌다. 나는 진심으로 미안했다. 어찌됐든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나라도 (김영삼 후보에게) 양보를 했어야 했다. 지난 일이지만 너무도 후회스럽다.

◇드디어 대통령 당선(1997년) = 새벽에 일어났다. 일산 우리 집 담을 넘어 애국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목포의 눈물 등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내 이름을 연호했다. "대통령, 김대중." 먼동이 트고 있었다. < 김재중 기자 >

2000년 11월15일 브루나이 영빈관 에든버러궁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대통령 재임 시절"대우사태 참 못할 일… 부시는 무례, 클린턴은 유연"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외환위기, 연평해전, 임기말 권력형 비리 등 재임시절 겪은 숱한 고비에 대한 소회를 담담히 밝혔다. 그간 말을 아끼던 대우사태와 김우중 회장, 'DJP 연합'의 균열과정에 대한 언급이 눈에 띈다.

◇대우사태 = 김중권 비서실장에게 김우중 회장을 만나 더 늦기 전에 강력한 구조조정에 나서라고 촉구하도록 했다. (…) 나는 그를 신뢰했고 대우그룹의 미래를 믿었다. 그러나 그는 내 의지를 경시하고 시장 움직임을 과소평가했다. 그가 왜 구조조정에 망설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돌아보면 그의 성장신화를 묻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일이었다

◇DJP연합의 균열과 파기 = 김종필 총리와 김영배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이 '옷 로비 의혹'과 '파업유도 의혹'사건의 특검제 수용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목소리를 냈다. (…)김 총리가 김 대행을 경질해야 한다는 뜻을 비서실에 전달했다. 나는 고민 끝에 국민회의 당8역을 경질했다. 공동정부를 깰 수는 없었다. 1999년 12월22일 김종필 총리와 만나 합당을 안 하기로 매듭을 지었다. 나는 국민회의·자민련 의원 만찬에서 총리의 부담을 덜어주려 그와의 담판을 솔직하게 밝혔다. (…)2000년 1월11일 국무회의에 김 총리가 마지막으로 참석했다. 나는 총리가 아닌 '정치인 김종필'이 탄 차가 출발할 때까지 본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연평해전과 북한 = 우리네 포용정책을 북한 측에 그토록 알아듣게 설명했는데 왜 그런 도발을 계속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자리에 들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제1차 연평해전은 햇볕정책이 순진한 발상이거나 유화적인 정책이 아니라는 것을 내외에 보여주었다.

◇클린턴과 부시 = 나와 클린턴 대통령은 손도 발도 마음도 모두 맞았다. 그는 논리가 정연하면서도 유연하게 상대를 설득했다.(…) 부시 대통령의 독선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부시 대통령은 내 답변을 가로챘고 심지어 나를 '디스 맨(This man)'이라고 호칭하기도 했다. 친근감을 표시했다고 하나 불쾌했다.

◇임기 말 권력형 비리 = 단언컨대 정부 권력이 개입된 비리는 있을 수 없었다. 내가 그런 일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터져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특히 '벤처 붐'에 편승한 비리는 나도 정신을 못차릴 정도였다. < 이인숙 기자 sook97@kyunghyang.com >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28일 서울역 앞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를 찾아 조문한 뒤 현 정부를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대통령 재임 이후"탄핵, 참으로 한심한 일… 그러나 나는 나서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3년 2월 퇴임 후에도 민주주의와 서민 삶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북핵 위기, 대통령 탄핵, 촛불시위 등 정치적·사회적 격변마다 촘촘한 단상과 의미를 남겼다. 특히 생의 마지막엔 한반도 평화와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우려가 깊었다.

◇탄핵 = 국회에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켰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그것도 최병렬, 조순형 같은 정당 대표들이 앞장을 섰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민심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참여정부 = 참여정부가 일련의 민주적 조치들을 펼치고 있음을 평가하지만 국민 의사를 수렴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현대 정치는 국민을 무시하고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국민으로부터 고립된 뜀박질은 실패를 향한 돌진에 다름 아니다. 나는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에 겸손하라 일렀다.

◇북핵 위기 = 2005년 2월10일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선언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미국은 북한과의 접촉에 나섰다. 6자회담을 재개하고, '9·19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그러나 미국은 다시 이를 준수하지 않았다. 네오콘들은 끊임없이 북을 괴롭혔다. 북·미관계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촛불시위 =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문자 메시지를 통한 직접민주주의는 아테네 광장에서 있었던 직접민주주의 이래 인류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우리 국민의 지혜와 힘이었다. (…) 서울광장은 자꾸만 멀어져 갔다. 촛불시위 이후 시민들의 접근을 봉쇄했다. 왜 광장의 민심을 무서워하는가. 광장이 살아 있어야, 그 속의 시민들의 말이 건강해야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 민주정권 10년을 같이한 사람으로서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었다. 장례위원회 측에서 내게 조사를 부탁했다. 이를 수락했다. 그런데 정부에서 반대한다고 다시 알려왔다. 내가 준비한 조사는 결국 읽지 못했다. 이제 그의 영전에 조사를 바친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 내십시다." < 김광호 기자 >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2000년 6월14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남북정상회담 비화"김 위원장 차량 동승 기분 좋았다, 손을 잡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 얽힌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냈다.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즉석 제안으로 차량에 동승해 나눈 대화를 처음 공개했다. 6·15 정상선언 합의에 대한 소회, 노무현 정부의 대북송금 특검에 대한 생각도 털어놨다.

◇김 위원장과 차량 동승 = 김 위원장은 뒤로 돌아 뒷좌석 왼쪽에 탔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파격이었다. 아내 자리를 뺏겼지만 기분은 오히려 더 좋았다. 사실 (차 안에서)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다만 김 위원장이 마음을 놓으라고 얘기하며 "북에 오는데 무섭지 않았습니까. 무서운데 어떻게 왔습니까"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에게 나의 바람을 얘기했다. "남북 국민과 세계가 관심을 갖는 회담에서 민족에 희망을 주는 결과가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차 안에서 손을 잡기도 했다.

◇6·15 공동선언 발표 후 숙소 = 지난날 독재 정권이 날 가뒀을 때 감옥에서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 아들과 정상회담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이루었다. (…) 물론 회담에서 고비도 여러 차례 있었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민족을 생각했다. 내 평생 가장 긴 날이었고 가장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진 날이었으며, 가장 보람을 느낀 날이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방북 추진 = (2000년 8월) 김 위원장이 (야당 총재 초청 요청에) 수락 의사를 밝혔다. 돌아온 박지원 장관은 '방북 초청' 문서를 야당에 보냈다. (초청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자) 한나라당은 "정부로부터 어떤 통보도 받지 못했다"며 즉각 부인했다. 이회창 총재 측근들까지 "그런 일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사실을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대북송금 특검 = 퇴임을 10여일 앞두고 "이 문제가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국민의 정부가 1억달러를 북에 지원하려 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법적인 문제가 있어서 현대를 통해 제공했다. 나는 진정한 국익이 무엇인가를 따져 결심했다. < 안홍욱 기자 >

< 김재중·이인숙·김광호·안홍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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