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자들의 용기 있는 하모니

변진경 기자 입력 2010. 10. 16. 12:13 수정 2022. 1. 21.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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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게이를 에이즈와 연결시키는 광고가 등장하는 등 사회 차별은 여전하지만, 성소수자들은 용기를 내 밖으로 나오고 있다. 퀴어문화 축제와 레즈비언 문화제를 열고, 게이 코러스는 노래를 부른다.

어느 겨울 저녁, 서울 종로2가 ‘실험공간 반쥴’에서 합창 공연이 열렸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삽입곡 ‘마이 페이버릿 싱스(My Favorite Things)’를 개사한 노래를 시작으로, 무대에 선 합창단원 20명은 지휘자의 지휘봉 움직임을 따라 노래 열네 곡을 불렀다.

두 시간 남짓 공연하는 동안 합창단원들은 여러 번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에 코끝이 찡했고, 눈가가 젖은 옆 동료의 모습에 울컥했으며, 관객들이 보내는 박수 소리에 눈물을 쏟았다. 공연을 마치고 밖에 나오니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기쁜 마음에 단원들은 즉석 야외 합창 공연을 벌였다. 2006년 12월16일, 남성 동성애자 코러스 모임 ‘지_보이스’의 첫 번째 정기공연 날이었다.

지_보이스는 2003년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소모임으로 출발했다. 이종걸 지_보이스 단장(32)은 “스스로 자긍심을 높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감수성을 알리는 데 합창만 한 것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하나 둘 모인 단원들은 매주 일요일 종로구 묘동 친구사이 사무실에 모여 화음을 맞췄다. 그렇게 시작된 지_보이스는 인권 행사 등에 불려가 노래를 부르다가 2006년부터는 매년 한 번씩 정기 공연을 벌이기 시작했다.

ⓒ시사IN 조남진 게이 코러스 ‘지_보이스’ 단원들이 합창 연습을 하고 있다.
사실 동성애자들이 무대 조명 아래서 노래를 부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 아우팅(Outing;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 본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의 공포 때문에 한참 동안 연습을 해놓고는 막상 공연 무대에 서지 못한 지_보이스 단원도 있었다. 하지만 합창단원 갈라(별명·43)는 “정기공연을 위해 6개월 정도 연습하다보면 처음에는 용기가 없던 게이도 열에 아홉은 마음을 바꾸고 무대 위에 선다”라고 말했다. 친구사이 대표이자 합창단원 박재경씨(38)의 말처럼 “우리 사정에 맞게 개사한 노래를 부르면서 스스로 마음의 치유를 받고 후배들에게도 이런 기회가 주어지게 해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어진 지_보이스의 정기공연은 오는 10월16일 동덕여자대학교 공연예술센터 대극장에서 5회를 맞는다. 가장 어린 잡채리나(별명·20)부터 최연장자 갈라까지 28명의 단원들이 그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벅차게 콩그레츄레이션’이라는 공연 주제에 맞춰 이번 공연에서는 밝고 신나는 자작(自作) 노래가 주를 이룬다.

“인생 뭐 있어” “콩그레츄레이션”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게이 친구 제시카(별명)에게서 영감을 얻어 만든 노래 ‘콩그레츄레이션(Con gratulations)’에서는 아픔을 이겨낸 서로에게 축하 인사를 보내고, 소심한 ‘길녀(길거리에서 파트너를 찾는 게이를 뜻하는 은어)’가 퀴어(동성애) 퍼레이드에 참여하면서 ‘액션 게이’로 탈바꿈한다는 노래 ‘길녀의 추억’은 벽장 속에 숨어 있는 게이 동생들에게 용기를 내 밖으로 나오라고 북돋아준다.  

ⓒ시사IN 윤무영 이화여대 레즈비언 인권운동 모임 ‘변태 소녀 하늘을 날다’ 회원이 학생들과 프리허그를 하고 있다.
“웨딩드레스 입고 여자친구와 결혼하고파”

올가을, 용기를 내 밖으로 나선 이들은 지_보이스 단원들만이 아니다. 지난 10월1일부터 이틀간 대구에서는 제2회 대구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축제 기간에 퀴어 영화가 상영됐고, 많은 성소수자가 동성로를 비롯한 대구 도심을 누비는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대구퀴어문화축제 배진교 조직위원장은 “지난해 처음 행사를 기획할 때 이 지역 성소수자 관련 활동가들이 ‘대구는 아직 퍼레이드를 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니 영화제 정도만 하자’고 할 정도로 성공 여부가 회의적이었지만, 막상 축제를 여니 의외로 많은 분이 퍼레이드에 참가했다”라고 말했다. 배 위원장은 “특히 지난해 축제 때는 행사장 주변에서 머뭇거리던 성소수자들이 이번에는 풍선을 불고 현장 질서를 유지하는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는 등 적극 참여했다”라고 말했다.  

이화여대에서는 10월4일부터 닷새 동안  이화 레즈비언 인권운동 모임 ‘변태 소녀 하늘을 날다(변날)’가 주최한 제8회 레즈비언 문화제가 열렸다. ‘인생’을 주제로 한 이번 문화제에서, 변날 회원들은 애인에게 줄 도시락을 싸서 함께 100일 기념 여행을 떠나는 레즈비언들의 일상과 “나도 웨딩드레스 입고 예쁜 여자친구와 결혼하고 싶다”와 같은 소망을 ‘손자보’에 표현해 전시했다.

변날 대표 박하씨(24)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박하지 않아 이런 문화제가 존중받는 분위기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변날 회원들은 아직 학생들 앞에 나설 때 인형 탈을 써서 자기 모습을 가린다. 2005년과 2008년에는 문화제 기간 학생문화관에 설치한 자보와 무지개 걸개가 교내 한 기독교 동아리 회원들에 의해 칼로 찢기거나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10월 1~2일 열린 제2회 대구퀴어문화축제에서 많은 성소수자가 거리로 나왔다.
세상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지난 9월29일 조선일보에는 “(드라마)〈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 책임져라!”라는 ‘바른 성문화를 위한 전국연합(바성연)’ ‘참교육 어머니 전국모임’의 의견 광고가 실렸다. 광고를 실은 유영미 바성연 간사는 “지상파 드라마에서까지 동성애 소재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것과, 일각에서 제정을 준비하는 차별금지법의 보호 대상에 성소수자가 포함될 것을 우려하는 두 가지 이유에서 광고를 게재했다”라고 말했다. “동성애자의 인권을 진정으로 보호하는 길은 그들을 이성애자로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것이다”라는 유 간사의 말처럼, 이들 단체들은 동성애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라고 본다. 

지난 10월4일 동성애자인권연대는 바성연 등의 의견 광고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동성애 혐오를 조장하고 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강화했으며 사회적 다양성을 공격했다”라고 광고를 주도한 단체와 그것을 실어준 조선일보를 비판했다.

같은 날 저녁 9시, 친구사이 사무실에 마련된 지_보이스 연습실에서는 이번 정기공연에서 부를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유 레이즈 미 업~시련을 넘고 넘어~ 유 레이즈 미 업~무지개 끝까지~.”

각자의 목소리들은 다 달랐지만 합쳐진 소리는 하나였다. 이종걸 단장은 말했다. “합창은 하면 할수록 어려워요. 내 소리를 내는 것보다 나와 다른 남의 소리를 잘 들어야 소리가 예쁘게 나오거든요. 우리 사회도 합창단 같아졌으면 좋겠어요.”

변진경 기자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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