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공생의 길, 작은 거인 윤기·다우치 모토이

2011. 3. 23.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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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오후 1시, 일본 도쿄 알카디아 이치가야 호텔에선 '재일한국노인홈을 만드는 모임 26주년 도쿄대회'가 열렸다. 동일본지진 참사 사흘 전 일이다. 이 모임은 일본에서 노인홈을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 '마음의가족'의 윤기(69·일본명 다우치 모토이) 이사장을 후원하는 단체. 이날 26주년을 기념해 특별히 모인 이유는 도쿄 노인홈 건립 기금도 마련하고 윤기 이사장의 모친인 고 윤학자 여사의 탄생 100년(2012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윤학자 여사는 일본인으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직후 전남 목포에서 한국 고아를 돌본 크리스천이다. 행사에는 일본의 정치·사회·종교·문화·스포츠 각계 인사 160여명이 참석했다. 후원자들은 윤기 이사장과 오래전부터 친분을 쌓아온 이들이 많았다. '유도의 전설'로 불리는 야마시타 야스히로(54), 재일동포 다큐멘터리 제작자 겐 마사유키(53), 평론가이자 동경가정대 명예교수인 히구치 게이코(73)씨 등이 격려사를 했고, 하시모토 다이지로우(64) 전 고치현 지사는 '윤학자 여사가 남긴 것'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이들은 윤 이사장을 '윤사마'라 불렀다. 윤 이사장이 마이크를 잡고 그간의 소회를 말하자 울먹이기도 하면서 3시간이나 자리를 지켰다. 참가비도 2000엔(2만7000원선)이나 내야하는 데 전국 각지에서 마다않고 모인 것이다. 다음날 일본 신문엔 작게나마 이날 행사 기사가 빠짐없이 실렸다. 추가로 관련 기사를 검색하다보니 이런 수식어가 눈에 들어왔다. '리토르 자이안트.' 윤기 이사장은 일본에서 '작은 거인'으로 통했다.

장남 윤기

윤기 이사장은 한국기독교사회복지사의 한 획을 긋는 윤치호, 윤학자 부부의 2남2녀 중 장남이다. 그의 부모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직후 전남 목포에 '공생원'을 세워 수천명의 고아를 돌봤다. 특히 윤학자 여사는 조선총독부 관리였던 아버지를 따라 목포에 왔다가 '거지대장'으로 불리던 청년 전도사 윤치호와 결혼해 수많은 한국 고아의 어머니가 됐다. 그의 깊은 신앙과 헌신적 사랑은 영화와 책으로까지 나왔었는데 영화와 책을 낸 주인공이 바로 아들 윤기다. 어린 시절 개구쟁이였던 윤기는 골치 꽤나 썩이던 아들이었다. 전후 보릿고개 시절 몰래 부엌에 들어가 모래를 한 줌 국에 넣고는 도망치던 아들. 고아를 돌보느라 자신에게 소홀한 어머니에 대한 반항이기도 했고, 타고난 기질 때문이기도 했다. 키도 유난히 작아 이래저래 튀었던 윤기. 지금도 키를 물어보면 난감해하는 그는 '5척 단구' 내지 '등소평 만하다'라면서 대충 넘어간다. 어찌됐건 그의 저서 '어머니는 바보야'에 따르면 늦게 철이 들었다. 커 갈수록 의젓해지고 단단해졌으며, 나이 마흔에 홀로 된 어머니에겐 둘 도 없는 버팀목이 돼 줬다. 1968년 어머니는 유언할 기력조차 없이 고이 누운 채로 고아들의 생일 축하 노래를 들으며 세상을 떠났지만, 윤기 이사장은 가슴으로 어머니의 유언을 들었다. "기야, 아이들과 함께 아버지의 공생원을 잘 지켜다오." 68년 11월, 그는 26세에 공생원장에 취임해 320명 고아의 아버지가 됐다.

노인 윤기

청년은 노인이 됐다. 82년 일본으로 건너왔으니 40년은 목포, 30년은 일본에서 살았다. 많은 일을 했다. 누나, 동생들과 힘을 합쳐 부모가 걸어왔던 공생(共生)의 길을 힘껏 따라 걷다보니 허름한 초가에서 출발한 공생원이 보육시설은 물론이고 장애아재활원, 직업훈련학교, 자활센터, 상담소, 양로원 등을 갖춘 사단법인 공생복지재단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심지어 일본에까지 와 양로원을 하고 있으니 큰 발전이다. 지금 운영하는 시설만 17곳이다. 그만큼 빚도 불었는데 4부 고리 이자로 960만원하던 부채는 현재 수 백 억원대로 커졌다. 그는 내일 모레면 칠순인데도 여전히 구청에 가 서류를 떼어 와서 다시 제출해야 하고, 말단 공무원을 찾아가 사정해야 하고, 방방곡곡 발로 뛰며 모금운동을 펼쳐야 하는 팍팍한 현실. 하지만 사회사업가의 길을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어머니가 메뚜기를 볶아주면서 공생원 아이들이 100명 정도면 좋겠다 하셨거든요. 어린 마음에 어머니는 스케일이 작아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100명이면 손수 요리를 해줄 수 있어 하신 말씀이셨어요. 그 어머니를 생각하면 제 마음이 한결같아야겠죠. 그리고 그 메시지를 계속 전하고 후배들도 전해 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11일 대지진 참사로 사무실이 휘청하던 순간에도 수화기를 놓지 않았던 윤 이사장. 지금은 모든 진행 사업을 중단한 채 지진 피해 돕기에 나선 상태다. 사회복지전문가들의 연합을 구성해 장기적인 지원책을 마련하는 한편 피해주민을 위한 실질적인 물자 조달도 시작했다. 국적은 달라도 진실은 통한다"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우메보시와 다베타이(매실 장아찌가 먹고 싶다)'라고 하셨거든요. 치마 저고리를 입고 한국말만 하던 어머니도 돌아가시기 전엔 그러시더란 말입니다. 그 심정을 아니까 고국에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재일동포 노인들이 생각나고 가슴에 메어지는 겁니다." 84년 일본 아사히신문에 기고한 '재일 한국인 노인홈 건설을'이란 글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사회사업가로 인생 2막을 펼쳤던 윤 이사장이 다시금 깨달은 사실은 '진실은 통한다'이다. 국적이 어떻든 간에 영혼이 감동하면 모든 일은 이뤄진다는 것. 그리고 부모에게서 받은 재산 1호. 살아온 이야기와 체험만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이야 말로 그가 가진 가장 큰 재산이다. 일본 사람과 재일동포의 후원으로 김치를 먹고, 아리랑이 흘러나오는 홀에서 춤을 추며, 따뜻한 온돌방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재일 한국인 할머니, 할아버지. 사카이·오사카·고베·교토에 이어 도쿄 등 에 총 10개의 '고향의집'을 짓는 게 그의 꿈이다. 우연히 보게 된 윤 이사장의 신분증. 다우치 모토이. 평생 '윤기'로 살아가길 원하고 모습도 말투도영락 없는 한국인이지만 그의 여권 이름은 '다우치 모토이'다. 목포 사나이가 지우지 못한 이름 다우치 모토이. 왜일까?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이경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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